빛처럼 찾아오는 시 받아적을 데 종이 위만큼 떨리는 공간 있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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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신달자

시를 반드시 종이에만 써야 한다고 고집했다가는 시대착오적이라는 얘기를 듣기 십상이다. 컴퓨터로 시상(詩想)을 옮기는 시인, 인터넷에서 시를 읽는 독자가 많은 세상이다. 그럼에도 시인에게 종이는 여전히 소중한 존재다. 섬광처럼 찾아오는 영감을 떨리는 가슴으로 받아 적는 순백의 정갈한 공간. 시인에게 종이가 상징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다.

 시인 신달자(68)씨에게 종이가 바로 그렇다. 단순히 시 쓰는 데 필요한 도구가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져 오히려 가치 있는, 아날로그적인 문학정신을 상징하는 존재다. 신씨가 시집 『종이』(민음사)를 냈다. 문예지에 발표하지 않고 쟁여두었던 76편을 모았다. 선집(選集)이 아닌 신작 시집이다. 하나의 주제, 즉 ‘종이’에 관한 작품이 집중적으로 실려 있다. 종이의 다채로운 면모가 감상 포인트다.

 종이는 우선 신씨의 육체적 경험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꽃 비친다 하였으나’는 초경(初經) 경험을 그린 시다. 초경이 찾아오면 꽃 비치는 거라고 말해야 하는 거라고 어머니로부터 교육받은 어린 신씨, 가랑이에서 물컹 떨어지는 살점을 종이에 묻혀 확인해 본 모양이다. 살점도 붉은 피도 꽃도 아님을 확인한 신씨, 어쨌든 자신은 ‘종이에게 첫 여자를 바’쳤기 때문에 종이와의 관계를 ‘죽어도 끊을 수 없’다고 노래한다.

 보다 감동적인 시는 역시 종이의 상징성과 신씨 자신의 시론(詩論)을 절묘하게 연결한 것들이다. ‘백지3’이 그렇다. 전문은 이렇다.

 ‘처음엔 소금기를 확 빼어 냈지/눈물 한 방울 제거하는 시간은 바다 하나를 한 방울씩 떠내는 방식이었어/한 세기가 느리게 저물었다/다시 한 세기가 저물어 가는 동안 젖은 시간들을 말렸다/다음엔 정식으로 공을 들이는 일이었는데 피를 완전히 뽑아내는 일이었어/종이에게도 욕망이 있다는 거 알아? 땅 갈듯 욕망을 갈아엎는 몇 방울의 피 그 마지막 한 방울까지 쭉 뽑아내는 그 순간 하얗게 피어나는 한 장의 사막/그/사막 위를 절룩이며 타닥타박 걸어가는 시인이 있다.’

 고통스러우면서도 지루한 창작의 고통, 그런 운명을 타고나 위태로운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신씨는 “7년 전쯤 종이책이 사라진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1년간 집중적으로 쓴 시들”이라고 말했다. 아날로그적인 종이시집에 헌사로 바쳐진 시집이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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