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최장집 교수에게 묻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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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학계의 거목 최장집(68) 고려대 명예교수가 자신의 학문 여정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책을 냈다. 정치철학책 『막스 베버-소명으로서의 정치』(폴리테이아)다. 민주주의 이론 전문가인 그가 정치철학으로 시선을 돌린 이유가 뭘까. 최 교수는 대표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2001년)에서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를 짚어냈다.

요즘에는 정치 현안 분석을 뛰어넘는, 보다 근원적인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바로잡는 일이다. 민주화운동 시절 정치는 흔히 부정의 대상이었다. 권력의 정당성이 도마에 올랐다.

최 교수는 그 여파가 현재에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주목했다. “정치의 부재야 말로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최대 적”이라고 말한다. 지난해 여름 12차례에 걸쳐 정치철학 대중강좌를 연 것도 그런 문제의식에서였다. 서양 정치철학의 원조 플라톤에서부터 마키아벨리·홉스·베버 등을 시대순으로 훑었다. 『막스 베버-소명으로서의 정치』는 그 강좌를 바탕으로 한 첫 결과물이다. 14일 오후 서울 광화문 그의 연구실을 찾아갔다.

 -보수적 사상가로 알려진 베버를 첫 정치사상가로 꼽은 이유는.

 “오늘 한국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정치사상을 먼저 소개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베버의 어떤 점을 높이 봤나.

 “한국 민주주의가 사반세기를 지나고 있는데, 좋은 정치인을 많이 배출하지 못한 것 같다. 좋은 지도자가 많이 나와야 민주주의가 발전하리라고 본다. 베버는 정치인의 자질과 정치인이 가져야 할 도덕에 대해 누구보다 깊이 생각한 사상가다.”

 -좋은 정치인의 조건은.

 “베버는 정치인의 도덕을 둘로 나눴다. 신념의 도덕과 책임의 도덕이다. 신념과 책임은 모순적 성격을 갖는다. 양립하기 어려운 두 도덕을 동시에 갖는 것을 베버는 정치인의 소명의식으로 중시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신념에 치중하다 보면 책임 윤리를 배제하기 쉽고, 책임을 강조하다 보면 원래 정치를 시작한 목적이 약해지기 쉽다. 베버는 좋은 정치인을 카리스마적 정치인이라고 했다.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동시에 갖춘 정치인을 그렇게 불렀다. 좋은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는 신념이 필요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본 것이다.”

 -베버에게 정치는 무엇이었나.

 “베버에게 정치는 권력과 폭력을 본질로 한다. 베버가 ‘악마적 힘’이라고까지 표현하는 영역이 현실정치에 포함된다. 베버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선한 것이 선한 것을 낳고, 악한 것이 악한 것을 낳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차라리 그 반대인 경우가 더 많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정치적 유아에 불과하다.’ 정치적 선의가 결과의 좋음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베버에서 카리스마의 의미는 우리의 일상적 용법과 다른가.

 “남들에 비해 탁월한 능력,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매력이랄까, 그런 것을 타고난 사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베버 이전에 종교사회학 분야에서 탁월한 예언자를 가리켜 카리스마적 종교지도자라고 했는데, 이 말을 대중화시킨 것은 베버다.”

 -베버는 마르크스와 많이 비교된다.

 “마르크스의 이론체계는 자기 완결적이고 역사 변화의 인과관계를 한 차원에 초점을 맞춰 설명한다. 자본주의 발전이 계급 양극화를 가져와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자본주의가 소멸된다는 식이다. 원인도 분명하고, 방법과 결과도 선명하다. 마르크스 이론은 잘 정돈돼 있다. 그래서 파워를 갖는다. 그런데 닫혀 있다. 그 속으로 들어가면 갇혀버린다. 그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생각을 발전시키기가 어렵다.”

 -마르크스와 다른 베버의 특징은.

 “베버의 이론체계는 열려 있다. 역사나 사회발전을 설명하는 변수가 단순하지 않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특정 원인에서 특정 결과가 나오는 도식적 체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베버를 안다고 해서 역사의 변화를 더 잘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닫혀 있지 않은 이론체계이기 때문에 베버의 생각을 좇으면서도 자기 생각을 넓힐 수 있다. 베버는 여러 얼굴을 가진 이론가다. 젊어서 사회경제적 문제를 놓고 마르크스와 동일한 계급문제를 탐구했지만, 마르크스와 다른 이론을 발전시켰다. 마르크스에서 정치는 경제구조의 하위 영역이다. 베버는 정치행위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마르크스보다 베버를 더 중시하는 듯하다.

 “한국은 마르크시즘 영향이 강했다. 특히 80년대에. 베버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관심이 없었다. 오늘의 민주주의와 정치를 이야기할 때 베버는 필수적이다. 베버를 마르크스와 대비시켜 부르주아 철학자로만 보면 그의 전체적인 면을 놓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사회경제적 구조를 주로 이야기했다. 베버는 구조적 문제와 함께 인간 실존의 문제까지 포괄한다. 신념과 현실 사이에서 어떤 판단이 옳을지 고민하는 실존적 인간으로서의 정치가를 베버는 그려내고 있다.”

 -베버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베버는 독일이 당면한 위기를 풀고자 했다. 정치적·경제적 후진국이었던 독일이 비스마르크의 통일 이후 20년간 발전을 계속하다가, 비스마르크 해임 이후 리더십 위기를 맞는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혁명이 발생하는데, 러시아 다음으로 가장 혁명 가능성이 점쳐진 곳이 독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독일의 국제정치적, 그리고 국내의 정치경제적 위기를 극복할 정치적 리더십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씨름했다. 그리고 그것은 권위주의적이거나 관료적 방식이 아닌 정치를 활성화하는 방식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베버의 눈으로 본 한국 정치는.

 “공동체에 대해 소명을 가지고 헌신하는 정치인을 발견하기 어렵다. 특히 권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그러하다. 좋은 정치인을 배출하는 조건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좋은 정치인의 배출 조건이란.

 “정당이 좋은 지도자를 양성해야 한다. 정당에서 검증에 검증을 거치면서 지도자로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는 이게 약하다. 정당 밖 인물이 특정 시점에 어떤 포퓰리즘적 분위기를 타고 덜 검증된 상태에서 등장하기 쉽다. 한국 정치는 잘못된 지도자를 선출할 리스크가 매우 높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과제와 연결되는 듯하다.

 “한때 부정했던 정치가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거리의 정치를 통해 민주화를 이뤄낸 역사를 부정할 순 없다. 민주화 이후 지금은 좋은 정치가 필요한 때다. 정치를 통하지 않고는 민주화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이룰 수 없다. 그동안 밑으로부터의 정치 참여를 강조했고, 국가권력의 남용과 권위주의를 감시·감독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러는 동안 좋은 지도자를 배출하는 문제로부터, 위로부터 국가를 운영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베버는 우리가 소홀히 했던 부분을 환기시킨다.”

 -2012년 대선과 총선을 앞두고 있다.

 “한국의 리더십이 직면한 현안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남북관계를 개선해 평화를 정착시키는 문제다. 다른 하나는 사회통합의 문제다. 성장과 복지를 잘 조화시킬 리더십이 요구된다.”

글=배영대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막스 베버 말·말·말

● 정치란 열정과 균형적 판단 둘 다를 가지고 단단한 널빤지를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 뚫는 작업이다.

● 자신이나 타인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하는 자는 이를 정치라는 방법으로 달성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해 보일지라도 좌절하지 않을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막스 베버(Max Weber)=1864년 독일 튀링겐주 에르푸르트 출생. 흔히 현대 사회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그의 학문 영역은 사회학에 한정되지 않고 역사학·법학·경제학·정치학 등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있다. 20세기 학문과 정치를 말할 때 그를 빼놓을 수 없다. 1920년 급성폐렴으로 타계. 주요 저술 『경제와 사회』 『소명으로의 정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등.

◆최장집=1943년 강릉 출생.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 시카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83년 고려대 교수로 부임한 이래 한국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일련의 책을 펴냈다. 2010년 정치철학을 주제로 한 12차례 대중강연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현재 고려대 명예교수. 주요 저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어떤 민주주의인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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