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평화와 한국통일 염원

중앙일보

입력

한국이 낳은 20세기 예술의 대가 백남준. 시대를 앞서가는 전위적인 작품뿐 아니라 "예술은 고등 사기"라는 등의 신랄한 발언으로 뉴스의 초점이 됐던 인물이다.

그가 새 천년 특별기획 'DMZ 2000'을 위해 '호랑이는 살아있다'를 제작, 다시 한번 화제를 모았다. 지난해 12월 31일 임진각에서 열린 이 행사는 새천년 준비위원회와 단국대 21세기 예술경영 연구소가 공동주최했다.

'DMZ 2000'은 비무장지대를 예술적으로 이슈화한 대형 이벤트. 총연출은 이동일 교수(단국대 연극영화과)가 맡았다. 이교수는 정보 수퍼 하이웨이의 차단지역인 비무장지대룰 모티프로 분단 현실에 대한 전지구적 공감대를 형성하고자 했다.

'DMZ 2000'에는 재즈.거문고.북.징.판소리.테크노 음악 등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의 시청각적 요소가 총동원됐다. 우주 창조에서부터 인간의 진화, 문명의 발전과 쇠락의 사이클을 거쳐 미래의 사이버 세계에 이르는 대서사를 엮어냈다. 이어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로 관심의 초점을 한반도에 집중시켰다.

총45분 분량의 '호랑이는 살아있다'는 밤12시 정각 임진각 평화의 종이 21번 울리고 난 직후에 시작됐다. 상영은 동양의 비파와 서양의 첼로를 형상화한 멀티모니터로 된 2점의 대형 비디오 조각을 통해 이뤄졌다.

아쉬운 것은 이 작품이 국내 방송으로는 14분, 세계 방송으로는 3분으로 압축돼 소개된 점. 편집본이 너무 짧아 백남준의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다.

'호랑이는 살아있다'을 통한 백남준의 메시지는 전지구적 평화와 공존, 통일에 대한 새 천년 한국인의 각오, 자신의 작가적 열망으로 집약될 수 있다. 관객은 빠르게 변하는 이미지의 연쇄를 통해 백남준 특유의 변형.반복.중첩의 미학을 다시금 경험한다.

고고 댄서.첼로 연주.장구춤 등 그의 단골 영상이 디지털로 재편집돼 끊임없이 변화하며 새로운 영상 이미지를 창출한다. 창공을 나는 희망의 새와 21세기의 격랑을 이미지화한 물결 무늬는 새 천년의 비전을 예시한다.

또한 그의 최근작인 레이저 아트와 그것이 발하는 광채가 영상화되는 가운데 백남준의 끊임없는 실험정신을 감지할 수 있도록 한다.

이번 작품의 절정은 그가 '금강에 살으리랏다'를 부르는 퍼포먼스 장면. 금강산에 대한 향수는 분단의 비극을 반영한다. 또한 미래의 한국인으로 거듭나는 작가 자신의 예술적 결단을 표출하는 듯하다. 작품속의 호랑이는 21세기 한국인 표상인 동시에 백남준 자신이 아닐까.

과거 자신이 발표했던 '우주 오페라' 3부작('굿모닝 미스터 오웰''바이 바이 키플링''손에 손잡고')에서 백남준은 명실상부한 총감독이었다. 중계차 사령탑에 앉아 존 케이지. 요셉 보이스. 필립 글래스. 피터 가브리엘 등 세계적 예술가와 팝 스타들을 호령하고 편집의 칼자루를 휘두르던 그의 모습은 용맹스런 한국의 호랑이 그 자체였다. 이번에 그는 작품 제목 그대로 살아있는 한국 호랑이의 기백과 역량을 다시 한번 과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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