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키워드] 22. 디제라티 (digerati)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디지털 혁명의 영향으로 지식인과 권력 엘리트의 판도가 바뀌고 있다. 19세기 말 제정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에서 20세기 말 멕시코 치아파스(Chiapas) 의 사파티스타(Zapatistas) 에 이르기까지 지식인은 민중의 편에 서서 권력에 대항했다.

20세기의 지식인은 민중과 권력 사이에서 끊임없이 양자택일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지식 기반 사회인 디지털 시대에는 지식이 스스로 권력이 된다.

디제라티(digerati) 란 디지털(digital) 과 리터라티(literati:지식인) 를 합성해 만든 신조어다. 디제라티는 ''지식인'' 의 사이버 버전으로 디지털 변혁의 선봉에 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디지털 시대의 지식인은 과거의 지식인과 달리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스스로 권력을 갖게 돼 디지털 시대의 파워 엘리트를 이룬다.

새로운 세기를 열어나갈 디지털 지식인은 인문과학과 자연과학의 경계를 아우르면서 ''제3의 문화'' 를 펼쳐나갈 잡종들이다. 그들은 말보다 행동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사후에 말로 비평하기보다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나가는 실행적 지식인이다. 디지털 지식인은 힘이 세다. 그래서 그들은 남의 권위나 힘에 빌붙지 않는다.

그렇지만 서로 연결하고 스스로 연대한다. 이들은 과거의 파워 엘리트와 달리 지연.학연.혈연의 연줄이 아니라 서로를 수평적으로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통해 스스로 연대한다.

디지털 시대에 독불장군은 없다. 21세기에는 아마도 디지털 기업을 이끄는 신진 디제라티가 사회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반면 사후약방문식 분석을 일삼는 사이비 전문가 집단은 몰락의 길로 들어설 것이다. 이미 수많은 대중이 디지털 언어를 쓰고 있고, 무엇보다 젊은 세대에서는 디지털 문맹이 드물기 때문이다. 앞으로 새로움과 개방성으로 무장한 젊은 디제라티들이 우후죽순처럼 출몰할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 사회를 주도할 사이버 스페이스의 새로운 엘리트는 누구일까.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야후를 만들었던 제리 양, 아마존의 베조스…. 세상 사람들의 찬사와 부러움을 온몸에 받고 있는 이들은 모두 정보사회의 선발 분야를 잽싸게 꿰어차고 총알처럼 먼저 달려나간 사람들이다.

이들의 가장 핵심적인 공통점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란 점이다. 이들의 뛰어남으로 손꼽히는 모든 인간적 미덕은 사실 금전적 성공이라는 최종적인 결과 때문에 빛나는 것이다.

아무리 창의적이고,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갖고 있고, 뛰어난 인간성을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성공이라는 마지막 잣대에서 빗나가면 디지털 시대의 ''사이버 엘리트'' 반열에 오를 수 없다.

바로 이 점이 디제라티 신화가 갖는 맹점이자 그림자다. 올해 초 우리나라에서도 ''신지식인'' 이란 말이 희망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한 적이 있다.

세간의 유행어로 떠올랐던 ''신지식인'' 이란 말은 성공신화의 ''국민의 정부'' 식 변형에 다름아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밀레니엄의 지식인, 디지털 시대를 선도하는 지식인의 모습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사이버 엘리트'' 는 누구인가. 성공 신화의 유리 옷을 훌훌 벗어 던져버리는 진정한 디제라티는 나타날 수 없는가.

나는 여전히 어둡기만 한 1999년의 모퉁이에 기대 서서 ''디지털 신채호'' 와 ''디지털 사르트르'' 의 출현을 꿈꾸어 본다.

백욱인(서울산업대 교수.정보사회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