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운동 이끈 '살아있는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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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에게도 당당한 주권이 있다. 이를 찾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소비자가 돼야 한다."

한국소비자연맹 정광모(鄭光謨.70)회장이 틈만 있으면 외쳐대는 말이다. 고희(古稀)의 나이임에도 흰 머리를 날리며 지칠줄 모르는 정열로 소비자운동을 이끌고 있는 鄭회장. 그는 우리나라 소비자운동에 있어 '살아있는 역사'로 큰 자리메김을 하고 있다.

29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그는 처음부터 소비자운동가로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가 첫 직업으로 택한 것은 신문기자.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던 51년 평화신문 사회부 기자로 뽑혀 79년까지 30년 가까이 서울신문, 연합신문, 한국일보 등을 돌며 사건현장을 누볐다.

그러나 결국 신문기자 생활이 그에게 평생을 소비자운동에 몸바치게 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여기자클럽회장을 맡은 68년 타사 여기자 10여명과 일본을 방문해 일본여기자단체와 간담회를 하던 중 난생 처음 소비자운동을 접하게 된다.

鄭회장은 "일본 여기자들이 간담회 도중 '과자상자 속에서 쥐똥 발견', '어린이용 플라스틱그릇에 포르말린 검출' 등의 기사를 소비자단체로부터 취재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당시 우리나라 소비자는 급속한 산업화로 성장한 기업들의 횡포에 작은 목소리 조차도 낼 수 없었던 시절. 그 뒤 귀국한 鄭회장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소비자보호를 역설해 그 해 바로 YWCA사회문제부 산하에 '소비자 고발센터'를 설치하고 부당한 피해를 당한 소비자의 권리 찾기에 나섰다.

이것이 우리나라 소비자보호운동의 시발점. 이후부터 불량상품의 고발 등이 잇따르자 한때 기업가들 사이에 '흰 머리의 여인을 조심하라'는 말이 돌 정도로 기업측의 경계가 심했다.

그러나 요즘은 기업들도 국산품의 품질향상과 국제경쟁력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70년 1월에는 소비자전문단체인 한국소비자연맹을 창설했으며, 78년에는 민간소비자단체의 힘을 결집하기 위해 6개단체를 모아 소비자단체협의회를 발족했다.

鄭회장은 소비자권익 보호를 위한 기본 법인 소비자보호법도 제정(79년)은 물론 이후의 개정작업에도 깊이 관여했다.

鄭회장은 요즘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오전 9시면 어김없이 한남동 사무실에 모습을 나타낸다. 소비자 고발 전화벨이 울리면 직원들에게 미루는 법도 없다. 소비자들의 불만 내용에 귀를 기울이며 현장으로 달려가 말끔하게 해결해준다.

직원들 사이에 "鄭회장과 통화를 한 소비자는 '행운'을 잡았다"고 할 정도. 아직도 미혼인 그에게는 소비자운동이 남편이며 자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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