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도 산재

중앙일보

입력

직장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나머지 자살했다면 업무상 재해로 보아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행정법원 제13부(재판장 이재홍 부장판사)
는 지난달 23일 한모(51ㆍ서울 서초구 잠원동)
씨가 남편 정모씨의 자살이 업무상 재해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등 부지급처분취소 청구소송에서 "피고는 원고에게 유족급여 및 장의비를 지급하라"고 원고승소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정씨가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지 못하고 업무실적이 저조해지면서 자책감등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다가 심각한 우울증과 대인공포증 증세로 정신과 치료를 받던 중 자살에 이른 점, 업무 이외에 자살할 이유가 없는 점을 볼 때 업무와 자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또 "업무와 자살의 인과관계가 의학적ㆍ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제반사정을 고려하여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단되는 경우에도 그 입증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며 업무상 재해로 인정되는 자살의 범위를 넓게 보았다.

64년4월 농협에 입사한 정씨는 세차례 우수경영자상을 받는등 탁월한 업무능력을 인정받아 98년 4월 가락시장 지점장에서 농협중앙회 경기지역본부 부본부장 겸 신용사업부장으로 발령받았으나 그해 6월 상반기 종합업적평가에서 신용사업부의 업무 실적이 전국 최하위권을 기록하는등 업무 부진과 상부의 질책으로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아 지난해 8월 자살,아내 한씨가 근로복지공단에 보상을 신청했으나 공단이 이를 거절하자 소송을 냈었다.

재판부가 인정한 내용에 따르면 정씨는 직원들을 상대로 한 강연이나 회의주재등에 정신적 압박감과 강박관념에 시달린 나머지 업무에 대한 자신감을 급격히 상실,아내 한씨에게 자신을 무능한 사람이라고 자책하거나 중앙연수원에서 직원들을 상대로 강의를 마친 후 "강의를 수강한 일선 책임자들이 나를 비웃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주위 사람들에게 불안한 모습을 자주 보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 자살하기 약 20일전인 지난해 8월 4일부터 신경과민·불면증·우울증·대인공포 증상등으로 인근의 신경정신과 병원등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 온 것으로 밝혀졌다.

재판부는 이같은 사정을 감안, "정씨가 새로 부임한 이후 업무 부진등으로 심한 정신적 압박감과 과도한 스트레스로 괴로워하다 불안·우울 증상이 심화되어 자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정신과 의사의 소견서와 한씨 및 직장동료들의 증언,그밖에 달리 자살할 이유가 없었던 점등을 근거로 자살과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와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오현아 기자<per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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