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갑 ’이라고 무조건 값 후려쳐서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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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이수기
경제부문 기자

대기업들은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다양한 사회적 책임을 요구받는다. 최근에는 ‘동반성장’과 ‘상생’이 기업들의 화두가 됐다.

 최근 한 대기업에선 총수가 회의 석상에서 상생을 강조하자 계열사 대표들이 일제히 협력업체들을 방문해 생산시설을 둘러보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지난해 말 재계에선 대기업들이 협력회사 대표 수백 명을 불러 놓고 금융지원·현금결제 강화 등의 상생 방안을 내놓는 것이 필수 이벤트처럼 진행됐다. 한 오너는 “항상 하던 일이지만, 어쨌든 보여지는 것이 중요하니까”라며 씁쓸해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본지가 소개한 대기업 임원과 중소기업을 이끄는 20대 청년 경영자의 인연(2월 15일자 E1면)은 흔치 않은 사례다.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청년 경영자에게 거래하던 대기업 임원이 청년을 다독이고 거래를 이어갔다는 사연이다.

 얘기의 주인공인 이마트 최성재 상무는 “반드시 돕는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거래회사가 오래도록 살아남아 좋은 제품을 내야 나중에 서로 이해도 구하고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일이었다는 것이다. 거래관계의 갑이라고 해서 무조건 윽박지르고 값을 후려쳐 일하는 세상은 지났다는 것이 최 상무의 얘기였다. 그가 청년 경영자에게 금융지원을 하거나 엄청난 기술을 알려준 것은 아니다. 거래관계를 이어가고 사업에 필요한 정보를 줬을 뿐이다. 청년의 회사는 불과 몇 년 새 매출을 두 배나 키웠고 이는 곧바로 이마트의 제품력 강화로 이어졌다.

 지난해 만난 한 중소기업 경영자는 “시설투자를 하고 싶어도 앞으로 거래가 계속 이어질지 알 수 없으니 투자를 할 수 없다”며 “식당이야 권리금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우리 같은 중소기업은 유통업체만 믿고 시설투자를 했다가 거래처가 바뀌면 바로 도산”이라며 한숨 지었다.

 대기업이 납품단가가 1원이라도 싼 협력업체를 찾는 일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중소기업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래야 중소기업도 시설투자를 하고 장기 계획도 세울 수 있다. 그 결과는 이들에게 물품을 구입하는 대기업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질 것이다. 그것이 상생의 시작점 이다.

이수기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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