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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 정치 뿌리 뽑자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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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경민
뉴욕 특파원

요즘 미국에선 막말로 재미 봤던 독설가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9세 소녀를 포함, 6명의 생명을 앗아간 애리조나주 총기 난사사건 때문이다. 사회적 영향력이 큰 스타 정치인과 언론인의 무책임한 막말이 미국 사회의 분열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비난이 쏟아지자 자정(自淨) 움직임도 바빠졌다. TV 방송국은 앞다퉈 뉴스나 토크쇼 진행자에게 입단속을 시키고 있다. 의회에서도 막말 정치를 몰아내자는 논의가 활발하다.

 그런데 독설가의 입에 재갈만 물리면 만사형통(萬事亨通)일까. 요즘처럼 미국에서 독설이 득세하고 있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극우 아니면 극좌다. 중간은 설 자리가 없다. 중도를 고집해온 CNN 방송 시청률이 곤두박질하고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만큼 독설이 뿌리내린 토양이 두텁고 넓다는 얘기다. 왜 그런 걸까.

 미국의 실업자는 이미 1500만 명을 넘어섰다. 일할 뜻이 있는 사람 열 중 하나는 실업자다. 850만 명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직장을 잃었다. 논 지 6개월이 넘은 ‘백수 달인’도 630만 명에 달한다. 미국에선 직장 문을 나서는 순간 집과 자동차를 함께 잃는 게 보통이다. ‘할부 천국’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회의 중심을 잡아온 중산층이 무너졌다.

 일터에서 쫓겨나 거리에 나앉은 사람의 심정이 오죽하랴.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은 집권 후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서민의 분노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 가진 자를 사정없이 몰아쳤다. 작용엔 반작용이 따르는 법이다. 오바마의 공세에 우파도 뿔났다. 세라 페일린(Sarah Palin) 전 알래스카 주지사의 험한 입과 ‘티파티(Tea Party)’라는 극우 정치운동이 지난 중간선거에서 먹혀든 건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진보정권 10년이 외환위기 이후 이어진 것부터 그렇다. 청와대가 서민의 절망과 한숨을 등에 업고 편가르기에 나선 것도 낯익다. 중도는 설 자리를 잃었다. 적군 아니면 우군만 남았다. 급기야 야당 국회의원 입에서 “이명박 정권을 확 죽여버려야 하지 않겠냐”는 무시무시한 말까지 나오는 지경이 됐다. 지난 정부에서 법무부 장관까지 지낸 분이 이 정도라면 말 다했다.

 막말 정치를 뿌리 뽑자면 땅부터 갈아엎어야 한다. 중산층이 탄탄해야 산성도 알칼리성도 아닌 중성 토양이 된다. 그런데 같은 문제를 놓고 한국과 미국이 쓰고 있는 답은 사뭇 달라 보인다. 진보와 손잡고 대통령이 된 오바마는 호랑이 등에서 내려왔다. 백악관을 점령하고 있던 개혁파 측근도 죄다 친기업 인사로 갈아치웠다. 남은 2년은 경제 살리기에 오롯이 쏟아붓겠다는 각오다.

 이와 달리 한국에선 새삼 복지가 화두(話頭)다. 그것도 보수여당 유력 대권후보가 먼저 꺼냈다. 야당은 급식에 이어 의료·보육까지 공짜로 해주자는 ‘무상 시리즈’로 맞섰다. 어느 길이 옳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중산층과 동떨어진 포퓰리즘 정책은 ‘꽝’이 될 공산이 크다는 거다.

정경민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