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39) 박정희와의 인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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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역을 관할하는 국군 제6관구 사령관으로 활동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가운데)이 미군과 환담 중이다. 1959년께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이 당시의 계급은 육군소장. 박 전 대통령은 53년 준장, 58년 소장으로 각각 진급할 때마다 남로당 전력 시비에 휘말려 심각한 고비를 맞았다. [중앙포토]


박정희 대령의 남로당 전력(前歷)은 그의 혐의 사실을 직접 다뤘던 내 입장에서 볼 때는 별 게 아닐 수 있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고, 더구나 적법한 절차를 거쳐 그의 혐의 사실과 군법재판의 판결 결과를 대조해 본 뒤에 내린 결론이기 때문이다. 그가 당시 남로당의 군사책으로서 그에 맞는 행위를 한 점이 드러났다면, 박정희 대령은 1948년 숙군 작업 때 이미 사형 집행대 위에 올라서서 다른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구명(救命)을 호소한 김안일 당시 방첩과장의 언급처럼 박 대령은 남로당 군사책으로서의 이름만 걸었지, 실제 군 내부의 누군가를 포섭하거나 조직한 일은 없었다.

 당시 숙군 작업의 실무 조사팀은 이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 내용은 나를 통해 육군 최고 지휘부에까지 보고가 됐던 것이다. 그 결과 박 대령은 집행유예를 받은 뒤 결국 군복을 벗었다. 그 문제를 새삼 누군가 다시 꺼냈던 것이다. 실무 라인에 서지 않았던 사람으로선 그런 이유를 들어 박정희 전 대령의 장성 진급에 제동을 걸 수는 있었다. 의심의 여지가 아직 남아 있는 것 아니냐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 대령은 숙군 당시 옷을 벗었다가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군에 다시 복귀해 나름대로 열심히 군 생활을 하고 있던 때였다. 게다가 침착하면서도 치밀한 업무 능력으로 주위에서는 높은 평판을 받고 있었다. 그런 그가 포병 병과로 전과한 뒤 준장 계급을 다는 과정에서 누군가에 의해 다시 한번 전력 시비에 휘말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사람들을 다 뺄 수는 없었다. 더구나 박정희 대령의 문제는 내가 직접 다뤘던 사안이어서 분명치 않은 이유로 그의 진급을 취소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경무대로부터 걸려온 “박 대령의 신분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내용의 전화를 무시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할 것 없다”는 식으로 그 전화를 물리쳤다. 박 대령은 그대로 진급을 했다.

 그러나 그 한 번이 마지막은 아니었다. 나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서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인연을 맺는다. 서로 만나서 뭔가를 부탁하거나, 밥이라도 먹으면서 어떤 사안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서 해결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대개는 서로 만나지 않으면서 ‘원거리(遠距離) 인연’을 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는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고비를 맞는다. 모두가 건국 뒤 그의 남로당 가담, 그 뒤에 이어진 숙군 작업에서의 조사과정이 문제가 됐다. 48년 숙군 작업 과정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는 장성으로 진급하거나 군의 요직에 오르는 과정에서 매번 고비를 맞았던 것이다.

 준장 진급 때에 이어 찾아온 고비는 56년이었다. 그는 당시 중동부 전선의 5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그해 초봄에 상당한 눈이 내렸다. 5사단에서는 결국 심각한 설화(雪禍)가 빚어져 적지 않은 수의 장병이 사망한 사고가 벌어졌다. 문책을 한다면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 나는 5사단과 인접 3사단에서 생긴 사고의 책임을 지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범했던 대통령은 “천재지변인데 사람 힘으로 어떻게 하란 말이야”라면서 그냥 넘겨줬다. 박 전 대통령도 그때 위기를 함께 넘겼다.

 그 다음의 고비는 역시 진급 때였다. 그가 준장에서 별 둘의 소장으로 진급하던 때는 58년이다. 나는 당시 두 번째로 육군참모총장을 맡고 있었다. 역시 같은 이유로, 더 강도가 높은 문제 제기가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준장으로 진급할 때 댔던 같은 이유를 들어 그런 문제 제기를 막은 적이 있다.

 나는 어쩌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군문에 들어선 뒤 소장 계급까지 다는 과정에서 그를 여러 차례 구해준 사람에 해당할지 모른다. 그는 결국 이 나라의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마침내는 대한민국이 오늘날의 세계적인 경제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 자리에 오르도록 내가 도왔다는 점을 내세우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아니다.

 단지 건국 직후인 50년을 전후해 대한민국이 거친 환경에 휩싸였고, 더구나 북으로부터 쳐내려 온 공산군을 맞아 싸워 국가의 존립 기반을 지켜내야 했으며, 이어 허허벌판에 선 심정으로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키는 그런 모든 과정에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이 참여해야 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비록 남로당 군사책에 이름을 올렸으나, 남로당을 돕는 행위에 나서지 않았던 박정희라는 인물을 살리고 인생의 고비 때마다 그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다. 그 역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대한민국이 전쟁의 참화로부터 신속하게 일어설 수 있었던 과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점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박정희 대령이 후일 대통령 자리에 올라 대한민국 경제가 ‘한강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는 점은 한국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가 나중에 맞이하는 인생의 고비에 대해서는 다시 다룰 것이다. 나는 어쨌든 53년 육군참모총장으로서 그가 준장으로 진급하는 길목에 있다가 그의 손을 다시 잡아 줬던 셈이다. 그는 마침내 별을 달았고, 결국 소장까지 진급해 60년의 4·19, 이듬해의 5·16을 맞이한다.

 역사 속의 조우(遭遇) 가운데 그와의 만남은 우연(偶然)이라면 우연, 기연(奇緣)이라면 또 기연이다. 그러나 나는 고비를 맞이했던 군인 박정희에게서 미래의 대통령이라는 예감을 조금도 받지 못했다.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내 눈에 들어왔던 군인 박정희는 그저 힘겨운 건국 과정에 선 대한민국이 필요로 하는, 그런 인재(人才) 중의 하나로만 비쳤던 것이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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