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View 성석제의 인생 도취] 해산물 식당서 스테이크 … “손님, 탁월한 선택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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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의 해변에 있는 그 식당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몇 해 전 가을이었다. 동행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사람으로 해산물로 유명한 그 식당을 인터넷으로 예약해 주었다. 미국에도 프랑스의 미슐랭가이드처럼 식당 등급을 매기는 자가트서베이가 있는데 거기서 최고등급을 받은 곳이라고 했다. 유명 식당 치고는 가격이 그다지 비싸지 않은 편이었다. 음식 값은 내가 낼 예정이었으니 그게 가장 마음에 드는 조건이었다.

 식당 입구에 들어서자 종업원이 다가와 한가운데의 약간 어두운 자리로 안내했다. 탁자는 두꺼웠고 의자는 묵직했다. 이윽고 백발에 키가 크고 나비 넥타이를 맨 종업원이 다가왔다. 주름진 그의 손에는 가죽 표지를 한 장중한 디자인의 식단과 그보다 조금 작은 와인 리스트가 들려 있었다. 모두들 격식과 연륜의 기운을 무럭무럭 피워 올리고 있었다. 유서 깊은 농촌의 유교 문화가 지배하는 집안 출신인 나는 그런 데 주눅이 들면 안 된다는 교육을 일찍이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바 있었다. 양반으로 보인다고 해서 모두가 양반이 아니라는 것도.

 코가 높고 긴 종업원은 인사를 건넨 뒤에 그 식당이 가까운 캘리포니아의 나파밸리에 있는 저명한 와이너리로부터 와인을 독점 공급 받기로 계약을 맺었다고 설명했다. 거기서 그해 생산된 와인이 아주 좋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귓등으로 들으면서 와인 리스트를 살펴보았는데 공부가 짧아서 그런지 고를 만한 이름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다고 몇 번 마셔봐서 눈에 익은 프랑스 보르도산 와인을 마시자니 가격이 미국산 와인에 비해 훨씬 비쌌다. 결국 하우스 와인을 마시기로 마음속으로 결정했다. 그게 그다지 내키지 않았으므로 나는 일단 다른 질문부터 했다.

 “저기 바다에 제일 가깝고 해 지는 게 잘 보이는 창가 자리로 옮겨주면 안 되나요?”

 종업원은 그 자리는 결혼을 앞둔 남녀들이 와서 청혼을 하는 자리라고 했다. 그날 청혼을 하는 사람이 없으면 비워둔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그에게 하우스 와인을 달라고 주문했다. 이어 뭘 먹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그 식당은 가까이 있는 항구에서 신선한 해산물을 무한정으로 공급받고 있었다. 다른 손님들은 게와 바닷가재, 물고기, 조개 같은 갖가지 해산물을 찌고 볶고 구운 것을 망치까지 동원해 내용물을 빼먹으며 즐기고 있었다. 언뜻 보기로도 엄청난 양이어서 두세 시간은 먹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 판단에다 타고난 청개구리 기질이 더해져 엉뚱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나는 식단 제일 하단에 구색으로 끼워 넣은 요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에는 ‘뉴욕 맨해튼 스타일 스테이크’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미 대륙 동부의 뉴욕에서는 흔한 바닷가재 말고 스테이크 요리를 개발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애써 그 식당에 나를 안내해준 사람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나타났다. 그는 이미 그 식당을 대표하는 해산물 요리를 주문한 참이었다. 나는 주문을 하면서 코를 높이 들고 종업원의 눈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종업원은 마침 그날 아주 좋은 쇠고기가 들어와 있다면서 내게 “탁월한 선택(That’s an excellent choice)”이라고 하고는 식단을 들고 가버렸다. 나는 비어 있는 창가 자리 너머 호박 빛깔로 물들어가는 저녁 바다를 바라보며 할아버지를 회상하고 있었다.

 잠시 뒤에 다시 온 종업원의 손에는 와인 병과 잔, 기타 소도구들이 들려 있었다. 능숙하게 병마개를 딴 그는 먼저 내게 피처럼 붉은 와인을 따르기 시작했다. 나는 손가락을 들어서 와인 잔에 갖다 댔다. 그리고 장마철 강물 수위가 올라가듯이 손가락 끝을 점점 위로 올렸다. 하우스 와인은 잔의 삼분의 일 정도를 따르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그 나파밸리의 유명 와이너리와 공급 계약을 맺었다니 와인을 꽤나 싸게 들여올 게 아닌가, 덕 좀 보자는 생각이었다. 내 손가락 끝이 잔 전체 높이의 7부 능선쯤에서 멈추자 종업원의 희고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나타났다.

 “지난달에 프랑스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 씨가 여기 오셨습니다. 그분은 손님과 똑같은 와인을 주문하셨는데 잔이 끝까지 다 찰 때까지 손가락으로 계속 가리키고 계시더군요.”

 그는 또다시 내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배려해 주었다.

 보름 뒤 집에 돌아와서 TV로 미국 영화를 보노라니, 식당에서 주문을 받는 종업원마다 “탁월한 선택”이라고 응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웃음이 나오면서도 다시 또 그 식당에 가고 싶어졌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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