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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채권단, 이해 못할 M&A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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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

B사장은 이름 대면 업계에선 누구나 알 만한 인수·합병(M&A) 시장의 큰손이다. 그런 그가 엊그제는 혀를 많이 찼다. 현대건설 매각이 화제에 오르면서다. 현대건설 채권단은 이날 현대그룹(회장 현정은)과 맺은 양해각서(MOU)를 해지하고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박탈했다. 선정 한 달여 만에 현대그룹에는 현대건설을 팔지 않겠다고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 대신 더 낮은 가격을 써냈던 현대차그룹(회장 정몽구)과 매각 협상을 벌일 예정이라고 밝혔다. B사장은 “도무지 시장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라고 했다.

 그가 ‘납득 못한’ 일은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채권단이 왜 계약을 중간에 바꿔 가며 ‘돈의 성격’을 따지느냐다. 채권단의 논리는 이렇다. “(현대그룹 측이) 프랑스 나티시스 은행 예금(1조2000억원)의 출처를 투명하게 밝히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이 1조2000억원이 막말로 ‘훔친 돈’인지 ‘남의 돈’인지 모른다. 자칫 이 돈을 빌리면서 뒷계약으로 현대건설의 알짜 자회사를 넘겨주거나 감당하지 못할 고금리를 물기로 했을 수 있다. 그랬다면 훗날 현대그룹은 물론 현대건설까지 어려워질 수 있다. 그래서 본래 계약 조건에는 없었지만 미심쩍은 ‘돈의 성격’을 철저히 따지게 됐다.” 그러나 금융계의 시각은 다르다. 한 금융계 관계자는 “집을 팔면서 매수자에게 (저금리로)은행에서 빌린 돈은 되고 (고금리로)사채업자에게서 빌린 돈은 안 된다는 식”이라며 “그럴 거라면 애초에 입찰 조건에 명시했어야 했다”고 말한다.

 둘째, 왜 한쪽만 ‘승자의 저주’를 걱정하느냐는 것이다. 과열·출혈 경쟁으로 물건을 산 쪽이 되레 망가지는 ‘승자의 저주’는 돈의 많고 적음을 가리지 않는다. 도요타자동차처럼 대규모 리콜 사태라도 일어나면 현대차그룹이라고 자유로울 수 없다. 현대그룹에만 ‘승자의 저주’를 들이대는 건 형평에 문제가 있다. 셋째, 왜 더 싸게 팔려 하느냐다. 현대차가 써 낸 가격은 5조1000억원. 현대그룹보다 4100억원이나 적다. 현대건설에는 2조9000억원의 공적자금이 들어갔다. 국민세금인 공적자금을 최대한 회수하는 건 정부·채권단의 중요한 목표다. 얼마 전 정부는 “경영권 프리미엄을 받을 수 없다면 우리금융을 팔 수 없다”며 민영화를 연기했다. 이런 잣대가 현대건설 매각엔 다르게 적용되고 있는 셈이다.

 넷째, 왜 채권단이 현대그룹의 경영권까지 신경 써 주느냐는 거다.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의 주력계열사 현대상선의 지분을 8.3% 갖고 있다. 이 지분이 현대차에 넘어가면 현대상선의 경영권도 위태롭다. 유재한 정책금융공사 사장은 “현대상선 지분을 시장에 팔거나 국민연금에 넘기는 방법을 고려 중”이라고 했다. 현대차에 현대건설을 팔더라도 현대상선의 경영권을 지켜줄 테니 안심하란 의미다. 뒤집어보면 채권단 협의도 거치기 전에 이미 현대차에 현대건설을 넘기겠다는 선언을 한 셈이다. 더불어 현대그룹이 낸 이행보증금 2755억원도 돌려줄 수 있다고 했다. 이행보증금은 MOU가 해지되면 ‘당연히’ 떼이는 돈이다. B사장은 “이를 돌려주겠다는 것 자체가 채권단이 켕기는 게 많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애초 이번 사태는 파행이 예견됐었다. 그런데도 채권단은 시작부터 갈피를 못 잡았다. 처음엔 현대그룹의 집요한 여론전에 크게 휘둘렸다. 입찰이 끝난 후엔 결과에 반발하는 현대차그룹의 완력에 휘청거렸다. 두 그룹의 눈치를 보느라 중간 중간 원칙과 잣대를 바꿔 논란과 시비를 자초했다. 지금 매각을 강행했다간 장기, 줄 소송을 피하기 어렵다. 현대그룹은 “계약을 위반한 채권단은 물론 (이를 부추긴) 현대차그룹에 끝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쯤 되면 답은 하나다. 매각을 일단 접는 것이다. 논란·시비를 원천봉쇄할 원칙·기준을 세운 뒤 다시 시작하는 거다. 냉각을 위해 다음 정권으로 미루는 것도 방법이다. 이때 현대차와 현대그룹은 아예 빼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자칫 두 그룹 간 싸움이 커져 나라 경제마저 주름질까 걱정이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