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영의 시시각각] 두 개의 승계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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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김환영
중앙SUNDAY 지식팀장

‘여자를 찾아라(Cherchez la femme)’는 프랑스어 표현은 영·미권의 식자층도 즐겨 사용한다. 어떤 남자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면 그 이유는 애정행각을 감추거나 어떤 여자에게 폼 잡기 위해서라는 뜻이다. ‘모든 사건의 뿌리에는 여자가 있다’는 보다 넓은 뜻으로도 사용된다. 아버지 알렉상드르 뒤마(1802~1870)의 소설 『파리의 모히칸족』에 처음 나온 표현이라고 한다.

 물론 여자가 아닌 다른 원인이 어떤 사건의 뿌리에 자리 잡고 있을 수 있다. 지금 한반도 위기의 배경에는 두 개의 ‘승계(承繼) 위기’가 있다. 첫 번째는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다. 북한의 천안함·연평도 도발은 북한 내 승계의 위기가 표출된 결과다. 사회주의 국가는 왕조 국가가 아니다. 3대 세습은 북한을 후원하는 중국도 용인하기 힘들다. 왕조 국가가 아닌 북한이 왕정식 승계를 시도하고 있는 게 북한 승계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두 번 째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전 세계 차원의 패권 승계 위기다.

 세계에 공식적이거나 법적인 패권국가(hegemon)는 없다. 사실상의 패권국가인 미국이 있을 뿐이다. 패권국가로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의 경제적 번영과 군사적 안정에 대한 책임을 자임해 왔다. 미국이 계속 쇠퇴하고 중국의 발전이 지속되면 언젠가는 미국과 중국 간에 패권이 교체된다. 이것이 국제사회 최대의 ‘불편한 진실’이다.

 승계의 절차가 명문화돼 있어도 승계의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런데 패권국가 위치의 승계에는 명문화된 규정이 없다. 패권 승계에는 위기가 따를 수밖에 없다. 패권국가라는 자리 자체가 비공식적인 것인데, 패권 승계를 명문화·공식화하는 것은 우스운 일일 것이다. 국제사회의 패권 교체에 장자 상속이나 투표와 같은 방법을 사용할 수도 없다. 가장 확실한 패권 교체는 패권 챔피언과 도전자가 전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핵으로 무장한 미국과 중국이 전쟁을 한다면 그 결과는 인류의 공멸이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세계의 패권이 넘어간 지난번 승계는 평화적이었다. 미국은 자연스럽게 패권을 쥐게 됐는데 ‘마지 못해’ 패권이라는 권리와 책임을 떠안은 감도 있다. 패권을 둘러싼 미·중 관계도 평화로울 수 있다. 미국의 패권이 연장되거나, 미국과 중국이 패권을 공유하거나, 중국이 패권을 평화적으로 차지하게 될 수도 있다. 패권이라는 게 의미가 없는 세상이 도래할 수도 있다.

 평화로운 패권 승계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중국이 정치적·경제적으로 성장하고 미·중 협력 관계가 발전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다. 그래서 중국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국이 패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해왔다. 그 시간을 지금 북한이 빼앗으려 하고 있다. 북한은 사회주의 권역 내 소련과 중국의 패권 경쟁을 이용해 재미를 봤다. 북한은 이제 내부적 승계의 위기와 미·중 간 승계의 위기를 연계함으로써 정권 연장을 시도하고 있다.

 패권은 경제·군사와 같은 부문별 패권과 ‘영향권(sphere of influence)’이라는 지역 패권으로 나눠볼 수 있다. 지금까지 미국에 대한 중국의 도전은 화폐 문제 등 경제적인 문제에 집중됐다. 군사적인 문제는 일단 접었다. 동아시아가 중국 영향권인지 미국 영향권인지도 그리 투명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미국과 중국 간 승계의 위기가 모든 영역에서 전개될 위험성이 커졌다.

 아직은 잠재적인 것에 불과한 미·중 간 승계 위기가 조기에 본격화되고 모든 영역에서 전개되면 북한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패자(敗者)가 된다. 북한의 도발로 중국과 미국 모두가 시험대에 올랐다. 지금까지는 북한의 전략에 모든 주변국이 휘말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새우 때문에 고래들이 싸우고 중국과 미국 내에 매파-비둘기파의 균형이 깨질 참이다. 북한이 승계의 위기라는 내부 모순을 세계 평화를 위협하면서까지 해결할 기회를 줘서는 안 된다.

김환영 중앙SUNDAY 지식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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