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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활짝 웃었습니다, 암과 싸워 이겼거든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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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경기도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소아암 치료 종결 잔치가 열렸다. 희망과 꿈을 잃지 않고 암과의 싸움에서 이긴 아이들이 활짝 웃고 있다. [국립암센터 제공]


수은주가 영하 3도까지 떨어진 14일 오전 11시. 경기도 고양시 국립암센터 지하 1층 강당에 크리스마스 캐럴 ‘루돌프 사슴코’가 울려 퍼졌다.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적힌 빨간색 모자를 쓴 ‘꼬마 산타’ 10명이 입을 맞췄다. 소아암 치료를 받고 있거나 최근 치료를 마친 아이들이다. 뼈에 생긴 악성종양과 싸우고 있는 지희(가명·8·경기도 파주시)양은 링거를 맞으며 노래하는 열정을 보였다. 일 년 간격으로 급성림프구성 백혈병에 걸린 나진·나희(가명·6·경기도 광명시) 쌍둥이 자매는 고사리 손으로 직접 만든 악기를 흔들며 박자를 맞추려고 애쓴다. 모두 면역력이 약해 마스크를 하고 노래를 불렀지만 이들의 ‘희망 캐럴’은 강당 끝까지 퍼져나갔다. “루돌프 사슴코는 길이길이 기억되리~~”를 끝으로 노래를 마쳤을 때 이들의 투병기를 지켜본 가족들과 의료진의 콧등은 루돌프 사슴코처럼 붉게 물들었다.

국립암센터 “치료 끝났다” 선언 … 가족과 함께 축하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고 있는 아이들. [최정동 기자]

국립암센터에서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이곳에서 암 치료를 받은 소아환자의 부모 모임인 ‘소망회’가 ‘소아암 치료 종결 잔치’를 마련했다. 아이들이 힘겨운 암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을 축하하는 자리다.

 국립암센터 소아암센터 박병규 센터장은 “치료 종결은 각종 검사를 통해 몸에 암이 남아 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어서 치료를 끝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암 재발 여부는 평생 관찰해야 하지만 일단 암과의 싸움에서 ‘판정승’을 얻어낸 셈이다.

 암을 이겨낸 꼬마 산타 39명의 이름이 하나씩 호명됐다. 박진영, 김민지, 최지훈···(모두 가명). 깊고 어두운 암의 터널을 빠져나온 아이들이 모두 불릴 때까지 강당을 메운 가족과 의료진 100여 명은 박수갈채를 보냈다. 아이들도 서로 “축하해” 하며 자축했다.

 암을 이겨낸 아이들은 치료 종결을 의미하는 기념 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제 더 이상 암과 견디기 힘든 치료에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 백혈병 쌍둥이 자매 중 언니인 나진이는 2년간 부모처럼 지극 정성으로 치료해준 의사의 품에 안겨 볼에 뽀뽀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1년 늦게 백혈병 진단을 받은 동생 나희는 내년까지 치료를 받아야 한다.

생사 넘나들면서도 “엄마 울지마” 위로

행사장은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이 자리에 서기까지 소아암 환자와 가족들은 ‘사형선고’와 같은 암 판정, 생사를 오가는 치료과정과 맞서야 했다.

수다스럽고 활달했던 박진영(가명·8·경기도 고양)양. 여섯 살이던 2008년 10월 배 근육에 암세포가 움튼 횡문근육종으로 진단받았다. 집에서 놀다가 발을 몇 번 헛디딘 후 다리 통증이 가시지 않았다. 진영이 엄마 이수영(가명·40)씨는 “아이를 달래다가 왼쪽 아랫배에 뭔가 만져져서 검사를 받았는데 횡문근육종 4기였다”며 “다리가 아픈 이유는 암이 척추까지 침투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를 악물었다. 2년간의 힘든 치료가 시작됐다. 항암제·방사선 치료를 받으며 천당과 지옥을 오간 진영이는 결국 암을 이겨냈다. “아이가 나을 거라는 믿음을 버린 적이 없어요. 오늘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네요.” 이씨는 진영이가 목에 건 치료 종결 메달을 보며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2008년 7월 급성림프구성 백혈병 진단을 받은 김민지(가명·9·경기도 고양)양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다. 항암치료를 받는데 약물 부작용으로 피떡(혈전)이 생겨 뇌혈관을 막아 의식을 잃었다.

 민지는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깨어날 때마다 눈웃음을 지으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울지 마세요. 나 잘할 수 있어요.” 엄마를 위로했던 민지는 당당히 병원 문을 나서게 됐다.

 지금은 성인이 된 조성진(가명·22·남·경기도 부천)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거리에서 행인과 부딪친 뒤 팔의 통증이 사라지지 않아 골육종을 발견했다. 어깨 밑에 있는 위팔뼈(상완골)에 암세포가 자라 신경까지 파고들었다. 뼈를 드러내고 새로운 뼈를 이식했지만 재발했다. 매정한 암은 폐까지 전이돼 조씨를 괴롭혔다. 팔을 잘라내고 생명도 위험하다고 했지만 보란 듯이 이겨냈다.

독한 항암제·방사선 견디며 건강한 내일 꿈꿔

꼬마 산타들 이 싸워 이길 수 있었던 자양분은 ‘꿈’과 ‘희망’이었다. 진영이의 꿈은 화가다. “어른이 되면 화가가 될 거예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진영이는 티셔츠 가슴에 단 동그란 배지를 보여주며 자랑한다. “여기에 그린 그림도 직접 그렸어요. 잘 그렸죠?” 배지에는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캐릭터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고 있다.

 이날 울려 퍼진 ‘희망 캐럴’은 이제 막 암과의 사투를 시작한 가족들에게도 완치할 수 있다는 믿음의 불을 밝혔다. 지난해 7월 급성림프구성백혈병으로 진단받고 치료 중인 손예은(8·경기도 파주)양. 함께 병실에 있었던 친구 진영이의 치료 종결을 축하해주기 위해 댄스 무대를 자청했다. 빨간색 체크무늬 치마를 입고 한껏 멋을 낸 예은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웨이브와 절도 있는 브레이크 댄스까지 선보이며 무대를 휘저었다. 예은이의 꿈은 가수다. “진영이를 위해 하늘만큼 땅만큼 연습했어요. 다 나으면 댄스 가수가 돼 사람들을 기쁘게 해줄 거예요.” 예은이의 댄스 축하를 받은 진영이의 꿈은 의사. “ 착한 여의사가 돼서 아픈 아이들을 치료해주고 싶어요.”

 이날 강당 맨 뒷자리에는 올해 9월 악성 뇌종양 판정을 받은 수진(가명·4·서울)양이 링거를 꼽고 휠체어에 앉아 엄마와 함께 행사장을 지켰다. 수진이 엄마(34)는 “ 암을 이겨낸 가족들을 보며 곧 건강하게 집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글=황운하 기자
사진=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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