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Global] ‘한국인 CEO 수출 1호’ 인도 비디오콘 최고경영자 김광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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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생각들’이라는 슬로건 아래 지난달 9, 10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2010 테크플러스’가 열렸다. ‘신개념 지식 콘서트’를 표방한 이 행사에는 경영·과학·디자인·예술 분야의 선구자 15명이 연사로 나섰다. 독특한 철학을 바탕으로 자기 분야의 혁신을 선도하고 있다는 게 이들의 공통점이었다. 인도 최대 가전업체 ‘비디오콘’(VIDEOCON)의 최고경영자인 김광로(64) 대표가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74년부터 2008년까지 LG전자에서 해외영업을 주로 맡았다. LG전자 인도법인 사장 시절에는 법인 설립(1997년) 4년 만에 인도시장 점유율을 1위로 끌어올렸다. 2008년 5월 비디오콘에 영입되면서 ‘한국인 CEO 수출 1호’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에게서 CEO로서의 철학, 가장으로서의 철학을 들어봤다. 

글=성시윤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회사에선

●강연시간(20분)을 다 안 채우고, 12분 만에 강연을 마치시던데.

 “말은 적게 하고, 청중과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을 좋아한다. 평소에도 ‘두 시간 강의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오면 1시간20분을 강연하고, 나머지 40분은 질문을 받는다. 그래야 재미있다.”

●j 독자들을 위해 이번 강연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 준다면.

 “요즘 뜨는 스마트폰 같은 것은 부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인류의 3분의 2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타깃으로 한 구 경제(old economy)가 잊혀져 가고 있지만, 여전히 중요한 시장이다. 예를 들어 인도에선 한 번 충전하면 닷새를 쓸 수 있는, 미화 30달러짜리 휴대전화가 많이 팔린다. 인도의 시골에서는 휴대전화를 매일 충전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인도와의 인연이 깊은 것 같다.

 “1974년 LG그룹에 입사해 77년부터 두바이에서 3년간 있었다. 그때 우리 거래선의 대부분이 인도·파키스탄 사람이었다. 주인은 아랍 사람이었는데, 현장에 나오지 않으니 인도·파키스탄 사람들과 일하게 된 거다. 거기서 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고,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됐다. 그 후에 중남미 지역본부가 있는 파나마에서 6년간 있었다. 그런데 그곳 전자상이 전부 인도 사람이었다. 그 후 인도에서 13년을 살았고, 인도회사에서 3년째 일하고 있다.”

●혁신이 중요한 화두다. 왜 혁신해야 하나.

 “사람은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 왜. 자기를 변화시키기 위해. 기업체도 마찬가지다. 세상 만물이 변화하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혁신은 곧 변화다.”

●개인적으로 변화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나.

 “나는 고등학교 3학년과 마찬가지로 영어 단어장을 쓰고 있다. (영어) 신문을 보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보고, 단어장에 써본다. 긴가민가 싶은 단어가 나오면, 단어장을 찾아본다. 평생 해온 습관이다. 그리고 한국 일간지에 실리는 사자성어 코너를 매일 찾아, 새벽에 붓글씨로 직접 써본다. 따로 서예를 배운 적은 없다. 솜씨가 엉터리지만 그냥 써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각각의 한자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인 뜻을 음미한다. 배우는 기쁨, 이것이 이노베이션이다. 아직 시작을 못 하고 있는데, 조만간 피아노도 배우려 한다.”

●하루 일과가 어떻게 되나.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한 시간 정도 집 주위를 걷는다. 아침 먹고 출근해서 오전에 업무 미팅을 마친다. 나는 오후에는 미팅을 안 한다. 그리고 집에 오면 오후 4시 정도 된다. 오후에는 또 아내와 함께 한 시간 정도를 걷는다. 매일 8㎞를 걷는다.”

●CEO가 그렇게 일찍 퇴근해도 되나. CEO들은 밤늦게까지 불 켜져 있는 회사를 좋아하지 않나.

 “나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다. 오전에 회의를 하다가 보완해야 할 부분이 생기면, 나는 ‘여러분끼리 오후에 자유토론하고, 내일 아침 9시에 다시 나랑 회의하자’고 한다. 나는 직원들에게 ‘나에게 보고(presentation)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여러분끼리 자유토론(free discussion)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직원들의 자유와 창의를 중요시한다는 것인가.

 “(회사) 주인이 누구냐. 그 사람들인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내 경영철학은 ‘종업원을 주인으로 만들면 모든 게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 CEO들은 종업원을 ‘종(servant)’으로 만들려고 한다. 말 잘 듣고 시키는 대로 잘 하는 사람을 만들려고 한다. 비즈니스는 전쟁이다. 종과 주인이 싸우면 누가 이기나. 종은, 적이 눈앞에 나타나는데 ‘공격할까요, 말까요’ ‘대포를 쏠까요, 소총을 쏠까요’ 하고 주인에게 물어본다. 인도에서 LG전자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인도 직원들이 주인의식 을 가지고 일한 덕분이었다. 직원들로 하여금 스스로 결정을 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오너십의 핵심이다.”

●직원들의 선택이 CEO의 생각과 다를 경우 어떻게 하나.

 “예상되는 문제점을 지적해주고 ‘한 번 더 자유토론을 해봐라’ 한다. 그런데도 역시 자기들 생각이 옳은 것 같다고 하면 그 결정을 지지해 준다. 내가 그저 지지를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경우가 회사 일의 90%다.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럼 CEO의 역할이 크지 않은 것인가.

 “좋은 코멘트 를 해야 한다. 그게 코치의 역할이다. 직원들이 ‘우리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자기들이 아이디어를 내서 결정한 것이니까, 성공시키기 위해서 별의별 방법을 다 쓴다. 그러나 CEO가 ‘이렇게 결정했다.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면, 성공하든 말든지 간에 그냥 지시받은 대로만 하게 돼 있다.”

●결정을 하면, 책임도 져야 하지 않나.

 “그렇다. CEO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밑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CEO가, 결정은 자기가 하고서 책임은 아랫사람에게 묻는다. 나는 인도직원들에게 ‘이것은 단지 나의 조언일 뿐 ’이라고 말한다. ‘여러분이 나보다 시장을 더 잘 알고서 결정한 것인 만큼 잘 되면 여러분이 보너스를 가져가고, 못 되면 여러분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많은 CEO들은 자기가 책임도 안 질 거면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한다.”

●그렇다면, 비겁한 CEO들이 경영하는 회사는 잘 안 풀려야 하는데.

 “장기적으로 볼 때 그런 회사는 잘 안 풀린다. 한국의 큰 그룹 중 망한 데들이 그렇다. 조그만 것까지 회장이 다 결정하고….”

●직원들에게 부드러운 CEO 인가.

 “나는 굉장히 악랄하다. 우리 조직은 고등학교 3학년이나 다름없다. 1등부터 꼴찌까지 좍 줄을 세운다. 보너스를 많이 받는 사람은 (월급의) 1400%를 받고, 적게 받는 사람은 한 푼도 못 가져간다. 나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숫자를 위해 일한다. 숫자가 우리를 정당화한다(We are working for numbers. Numbers are justifying us)’. 인도는 땅이 한국보다 스무 배 넘고, 인도 방방곡곡에서 우리 세일즈맨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일하든지 그것은 그들의 완전한 자유다. 그러나 어쨌든 목표 달성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왜. 목표 달성이 그 사람에게 자유를 주니까. 그런데 보통의 CEO들은 자꾸 과정을 간섭하려고 든다.”

가정에선

김광로(오른쪽)·윤경혜씨 부부는 다른 부부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꼐 보낸다. 사진은 중국여행 중 찍은 것이다.

김광로 ‘비디오콘’ 대표는 인터뷰 장소에 아내 윤경혜(56)씨와 함께 나왔다. 김 대표 부부는 결혼 4년차이던 1977년부터 두바이 생활을 시작, 이후로 미국·독일·파나마·인도 등지에서 줄곧 함께 있었다.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부부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부부가 늘 함께 지냈다는 게 대단한 것 같다.

 “다행히 아내도 나와 비슷하게 외지의 문화를 좋아한다. 해외지사 나갈 때마다 아내가 ‘오지라서 싫다’ 이런 얘기를 해본 적이 없다. 아이들도 함께 있었다. 내 생각에 ‘온탕과 냉탕’이 사람을 단련시킨다. 아이들도 비교적 잘 자랐다. 아들이 둘인데, 둘 다 미국에서 의사를 하고 있다. 큰애(33세)는 내과의사를, 작은애(29세)는 치과의사를 하고 있다.”

●특별히 자식들에게 교육한 것이 있나.

 “그저 아이들에게 한자를 열심히 가르쳤다. 시장에 가면 ‘100자 한자’ ‘200자 한자’라는 것을 판다. 벽에 붙이도록 넓게 만들어 한자를 많이 적어놓은 것이다. 그런 걸 사다가 아이들 방에 붙여주고, 방학 때 열심히 외우게 했다.”

●왜 한자를 가르치게 됐나.

 “내가 옛날의 선비정신을 좋아한다. 선비의 원대한 이상은 ‘여유를 갖고 소박한 생활을 하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논어를 읽고, 마음에 드는 문구를 메모하고, 붓글씨로 써 본다. 내가 출장을 많이 다니는데, 그때마다 문방사우 세트를 가지고 다닌다.”

●가정의 대소사는 어떻게 결정하나. 회사에서처럼 자유토론을 하시나.

 “아내가 ‘우리 회장님’이다. 회장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 하하.”

●부부가 시간을 함께 많이 보내시는 것 같다.

 “매일 오후에 집 주위를 걸을 때 함께 걷는다. 영화도 한번씩 보러 가고…. 운동도 늘 일주일에 한번 같이 한다. 그렇게 같이 잘 지낸다.”

●부부가 떨어져 지낼 때는 없나.

 “아내가 1년에 한 달 정도는 한국에서 혼자 지낸다. 그게 아내의 휴가다.”

●어릴 적 가풍은 어떠셨나.

 “저희 아버지가 굉장히 냉정할 정도로 자녀들에게 자유를 주셨다. 7남매였는데, ‘공부하라’는 말을 절대 안 하셨다. 잔정은 없으셨는지, 간섭도 안 하셨다.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하는 거다’ 이런 말도 안 하셨다. 그게 오히려 무서운 메시지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컸다. 자식을 키워 보니 부모가 자꾸 도와주고 간섭을 하면, 자녀가 어린(childish) 아이로만 남는 것 같다.”

●지금의 인생철학은 그때 생긴 것인가.

 “초등학교(충남 논산 강경 황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서 바로 서울에 유학을 왔다. 서울에 친척이 없어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하숙을 했다. 그래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객지에서 공부를 하면서 제 딴에는 빨리 생각이 성숙한 게 아닌가 싶다.”

●가족 경영과 회사 경영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가정이든 회사든 누가 됐든 간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제가 좋아하는 말 중에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정해진 그릇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리더는 스스로 종이 돼야 한다. 리더의 역할이 뭐냐 하면 조직구성원을 지지해 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성인군자나 촌부나 생각이 비슷하다. 성인군자에게 브랜드가 있을 뿐이지.”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

 “한국 사람이라는 박스를 뛰어넘어 건전한 세계시민이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라는 것이다. 다양한 가치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요즘 베스트셀러인 『정의란 무엇인가』도 그런 내용 아닌가. ‘정의란 무엇이냐. 바로 이것이다’라고 얘기한다면 그게 바로 흑백논리다.”

김광로

1946년 충남 논산 강경 출생. 65년 경기고, 69년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74년 LG그룹에 입사했다. 77년 두바이 파견을 시작으로 LG전자 중남미 지역본부장, 서남아·동남아지역 대표를 역임하는 등 2008년까지 줄곧 해외영업을 해왔다. 2005년 석탄산업훈장을 받았다. 저서로 경영철학서 『세계경영 크레도』(2009)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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