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32) 노련한 정치가 이승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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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월 6일 도쿄에서 열린 첫 한·일 정상회담 대표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머피 주일 미국대사, 오카자키 가쓰오 일본 외상, 요시다 시게루 일본 총리, 이승만 대통령,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 김용식 주일 공사. 미국의 주선으로 회담에 나섰지만 이 대통령은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서두를 생각이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나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따라 회담에 배석한 김용식 주일 공사에게서 그 내용을 들었다. 한국 측 회담 대표는 이 대통령과 김 공사였으니, 그에게서 다른 어느 누구보다 더 정확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김 공사가 전해준 이야기는 이렇다. 요시다 총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외교관 초년 시절 중국 안둥(安東·지금의 신의주 맞은편에 있는 단둥)에서 일본 영사관 영사보로 근무할 때 한국에는 호랑이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호랑이가 많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조금 동떨어진 대답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들을 셋은 낳아야 한다고 합니다. 맏아들은 대를 잇게 하고, 다른 한 아들은 스님으로 만듭니다. 이 둘 중에 하나는 범에게 물려갈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아들 하나가 더 있어야 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따지고 보면 요시다 총리의 질문에 어느 정도 긍정을 한 셈이다. 그러나 딱히 그 질문에 들어맞는 대답도 아니었다. 요시다는 실제 지금 중국 단둥의 일본 영사관에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사람이다. 한반도에도 자주 드나들었을 그는 당시의 한국에 호랑이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다소 싱겁겠지만, 이 대통령과 요시다의 회담에서 나왔던 ‘조선 호랑이’에 관한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어떤 영문인지 이 이야기는 전회에서 소개한 것처럼 ‘요시다의 질문에 대한 이 대통령의 강력한 꾸짖음’으로 각색돼 일반에 알려지고 말았다.

 그러나 부산 수영 비행장을 떠날 때, 그리고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 트랩을 내릴 때, ‘마에다 하우스’의 회담장을 들고 날 때 내가 지켜본 이 대통령의 표정은 한결같았다. 무엇인가를 곰곰이 따지고 생각해 보는 표정이었다.

 회담은 이미 소개한 대로 결렬로 끝이 났다. 일제 강점기를 거친 한국은 국교 수립으로 가기에는 일본과의 정서적 장벽이 아직은 너무 크고 높았다. 이 대통령은 그 점을 잘 알았고,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제대로 헤아렸던 것 같았다.

 이틀 밤을 도쿄에서 보냈지만, 이 대통령이 요시다와 회담한 것은 단 한 차례였다. 회담을 주선한 미국 측도 결국 더 이상 무엇을 강요할 처지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일행은 7일 도쿄를 떠나게 됐다.

 이 대통령 부처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 그리고 나와 다른 비서관들은 하네다 공항으로 다시 나와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장까지 오는 길에 살핀 일본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불과 1년 전에 휴전회담에 참석했다가 느닷없이 “일본을 다녀오라”는 말을 듣고 와봤던 일본이었다. 이 대통령을 수행하면서 봤던 일본은 그때의 일본보다 더 발전했다는 느낌을 줬다.

 그 모두 다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철저하게 무너졌다가 이웃인 한국에서 벌어진 전쟁 덕에 일어섰던 것이다. 한국을 강점해 통치했던 일본이 다시 일어서는 모습이 나와 우리 일행의 눈에 편하게 받아들여질 리는 없었다.

 길은 삼엄했다. 미군과 일본 경찰이 도로 곳곳에 늘어서 철통 같은 경호를 하고 있었다. 일본인에 의해, 또는 다른 어떤 세력에 의해 혹시 벌어질지도 모를 테러에 대비해서였다. 하네다 공항에는 동포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배웅을 했다. 이 대통령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도 나와서 맞아 주었던 동포들이었다.

 비행기에 오른 뒤에는 이 대통령과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회담에 대해 대통령에게 질문을 했다. 누군가는 “대통령 계시는 동안 일본과의 수교를 마무리 짓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이 대통령은 “이번 회담에서 해결한 것은 전혀 없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아무래도 쉬운 일이 아니야”라고 말을 꺼냈다. 그는 만감이 가슴속으로 섞여서 지나가는 듯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대통령은 이어 “일제 때 저들 밑에서 ‘종살이’한 세대가 우선 사라져야 해. 새 싹이 자라서 대등한 입장에 서야 하는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일본과의 진정한 수교는 힘이 들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30~40년은 더 세월이 흘러야 할 것이야”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냉정하게 일본과의 관계를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 사람들이 가슴속으로 깊이 품었던 상처가 사라지기 전에는 진정한 한·일 관계 수립이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이 대통령은 미국의 주선에 의해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 회담에 나선 판이었다. 그는 미국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회담 자리에 나서기는 했으나 실질적으로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본 것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로부터 한국이 벗어난 지 불과 8년이 되지 않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민족의식이 첨예하게 불거진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일본과의 관계를 서두르는 것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위험한 행위라고 봤을 것이다.

 그의 최대 현안은 미국과의 관계를 크게 강화해 당면하고 있던 적, 북한군과 중공군을 물리치고 대한민국의 위상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그보다는 한참 뒤의 일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은 그렇게 자신의 정치적 입지(立地)를 정확하게 읽는 안목이 있었다. 당시의 대한민국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이룰 수 없는 것과 성취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가르는 스타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냉정한 현실주의자요, 달리 보면 대세를 정확하게 읽는 정치인이었다.

 아무리 일본에 대한 증오와 원한이 깊다고 해도 “너희가 다 잡아가서 한국에는 호랑이가 없다”라는 식의 호통과 감정적인 설욕(雪辱)으로 그들을 대하는 대통령은 아니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치의 흐름과 대통령으로서 국내적인 정치 상황을 모두 아우를 줄 아는 노련한 전략가이기도 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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