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복의 명품TALK] 위기의 구찌 구한 톰포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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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를 말하면서 톰 포드를 빼놓을 순 없다. 1990년에 구찌에 들어와 94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지명되면서 파산 위기에 처해 있던 구찌를 다시 일으켜세운 주인공이다. 구찌를 다시 명품 반열로 올려놓은 뒤 그는 '73세의 구찌를 23세로 만들었다'는 극찬을 받았다.

'모든 화려한 것을 표현하는 최우선 요소는 편안함과 단순함이다.' 그의 패션 철학의 기본이 담겨 있는 말이다. 그렇다고 그의 디자인이 화려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절제된 디자인 곳곳에 화려함과 관능미가 녹아 있다.

1961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을 뉴멕시코주 산타페에서 보냈다. 10대에 뉴욕으로 이사 와 뉴욕주립대에서 미술사와 연기를 공부했다. 그 뒤 파리에 있는 파슨스에서 패션 디자인 과정을 수료한 후 뉴욕으로 돌아온 그는 1986년 캐시 하드위크란 스포츠웨어 브랜드를 거쳐 88년 페리엘리스에 들어갔다.

톰 포드가 구찌에 몸 담은 것은 90년. 밀라노에서 구찌 여성복 디자인을 맡은 것이다. 이후 그는 입생로랑 퀴뜨르와 입생로랑 향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를 맡아 구찌와 입생로랑 두 브랜드의 이미지 포지셔닝을 책임지게 되었다. 94년 구치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지명되면서 집안 싸움으로 땅바닥에 떨어진 구찌를 절제된 럭셔리 브랜드로 화려하게 컴백시켰다.

'디자인은 순간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디자인도 짧은 시간이 지나면 변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디자이너도 따라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멋진 드레스도 각광받는 시간은 순간이다. 한 달도 아니고 한 주도 아니다. 파티가 끝나면 드레스의 생명도 끝난다." 그래서 그는 끊없는 변화와 새로운 시도를 강조한다.

그가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한 시기는 1990~2004년이다. 제품은 물론 광고, 매장 디자인까지 총괄했다. 94년 2억3000만달러에 불과했던 구찌 매출을 2003년 30억 달러로 13배로 끌어올렸다. 그는 한 시즌에 브랜드를 대표하는 하나 또는 두 개의 지배적인 스타일만 강조하는 에디팅(editing) 컬렉션이라는 걸 유행시켰다. 1995년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상과 MTV상을 수상하였다.

2004년 계약기간이 종료되면서 구찌를 떠난 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브랜드를 론칭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안경과 선글라스다. 유명 안경업체인 마르콜린그룹과 손잡고 '톰포드 아이웨어'로 큰 성공을 거뒀다. 2006년 유명 화장품인 에스티 로더와 함께 '톰포드 뷰티'라는 뷰티 향수라인까지 갖추었다. 지금은 남성 정장을 비롯해 구두, 타이 등 종합 패션 사업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남성복은 2007년 뉴욕 매디슨가에 단독 매장을 내면서 본격적으로 시작해 현재 밀라노 런던 LA 오사카 등 대도시에 부티크를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 남성의류는 2009년 가을 상륙했다. 가격대는 수트가 500만~800만원, 셔츠 60만~80만원, 타이 30만원, 구두 100만~500만원 선이다.

그는 정말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2009년 말엔 '싱글맨'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가 영화 감독으로 나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걱정이 기우였음을 보여줬다. '싱글맨'이 66회 베니스 영화제에 공개되는 순간 원작(소설)을 뛰어넘는 몇 안 되는 영화라는 소리를 들었다. 주인공을 맡은 콜린 퍼스는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이 영화는 동성애자인 남자교수가 주인공이다. 톰 포드 자신도 게이다. 그래서 그는 게이들의 심리묘사를 누구보다도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뉴욕주립대에서 연기를 공부했고, 디자인의 세계에 뛰어들기 전 TV 광고 모델로도 활동한 적이 있다. 하지만 데뷔영화에서 이렇게 찬사를 받는 작품을 만들어내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역시 감각과 탤런트를 타고난 사람인 것 같다.

영화를 만든 직후 그는 다시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6년 만에 여성복을 만들기 시작해 2010년 늦가을 뉴욕에서 패션 쇼를 열었다. 영화 세계에 잠깐 발을 담갔다 본업으로 돌아오는 '치고 빠지는 기술'을 구사한 것이다.

심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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