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타 회장 타계로 본 소니의 성공과 좌절의 드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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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일본 회사의 이름을 대라고 하면 대개 '소니'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이 자신의 박식함을 과시하려 한다면 “소니는 진정한 일본식 기업이 아니죠. 외양이 화려해 마치 미국 기업 같아요”라고 덧붙일 것이다.

그러나 존 네이선의 신저(新著)
‘소니: 내면의 역사’(가제·Sony: The Private Life·Houghton Mifflin刊)
를 읽어보면 그런 허풍을 간단히 잠재울 수 있다. 네이선은 가전제품에서 출발해 영화, 그리고 음반으로 영역을 넓힌 대기업 소니를 ‘매우’ 일본적인 기업으로 단정한다. 소니 직원들은 파티 때마다 사케를 즐겨 마시는 등 모든 면에서 가장 일본적이라는 것이다. 캘리포니아大(샌타 바버라)
일본 문화학 교수인 네이선은 일본의 기업관행과 할리우드 등을 두루 조명한다. 경영 부문에서 올해 지금까지 나온 책 가운데 이보다 더 좋은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소니는 이부카 마사루(井深大)
와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
라는 두 사람이 창립한 회사다. 44년 처음 만난 그들은 40년 동안 함께 일했다. 그중 나이가 많은 이부카는 전기 기술자였다. 그는 끈과 봉랍(封蠟)
, 그리고 오래된 배터리만으로도 놀라운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모리타는 저명한 양조 가문의 장남으로 옛 일본의 정밀하고 엄격한 사업관행에 몰두한 사람이었다(일본 업계 지도자중 가장 ‘서양적’이라는 모리타에 대한 평판은 절반만 옳을 뿐이다. 그는 일본 전통과 연공서열식 조직에 대한 존경심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 그들은 일본 업계 및 정계의 엘리트들과 가진 막역한 연줄을 바탕으로 46년 5월 소니를 창립했다.

이부카는 대량생산이 가능한 상품을 찾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것이 바로 테이프 녹음기였다. 시종일관 전기 기술자였던 이부카는 끝내 디지털 기술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다. 반면 모리타는 소니의 미국 진출을 이끌어 62년 뉴욕 맨해튼 5번가에 전시장을 개장했다. 그 위에 나부낀 일장기는 2차대전 이후 뉴욕에 처음 내걸린 것이었다.

네이선은 자신의 책에서 소니가 미국 사업에서 성공과 좌절을 맛본 것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소니의 89년 컬럼비아 픽처스 매입은 거의 우연으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니 이사회는 제시된 매입가가 너무 높은 것으로 결론짓고 입찰을 포기했다. 그러나 당시 모리타는 만찬중에 이렇게 말했다. “참 안됐어. 나는 늘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사를 소유하는 것이 꿈이었는데 말이야.” 그러자 이사회는 곧 결정을 번복했다.

소니의 운명은 이제 또다른 두 명의 고참 경영인인 오가 노리오(大賀典雄)
회장과 이데이 노보유키(出井伸之)
사장에게 맡겨져 있다. 네이선은 그들의 관계가 부드럽지만은 않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오가는 이데이에 대해 “그는 나만큼 돈 버는 데 대한 감각이 뛰어나지 못하다”고 말했다. 이데이는 오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경영 회의에서 내 연설에 대해 불평한다. 너무 개념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소니 사장에게 기대하는대로 행동하기로 작정했다. 어쨌든 그가 회장이 아닌가.”

그런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 유산은 기발한 사업능력과 소니 창업자들의 오랜 우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모리타는 93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수년 간의 투병생활 끝에 지난 3일 세상을 떠났다. 이부카는 97년 사망했다. 경영 부문의 책치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적인 것은 드물다. 그러나 모리타의 부인이 이부카의 장례식에서 읽은 송덕문을 보고나서도 눈물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매우 강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Michael Elliott 국제판 편집장
뉴스위크 한국판(http://nwk.joongang.co.kr) 제 399호 1999.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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