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임시 학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9면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제국의 크세르크세스 1세 대왕이 아테네 가까이까지 진격해 왔을 때다. 아테네 사람들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트로이젠으로 피란을 갔다. 당시 피란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먹는 것이었을 터다. 그러나 아이들 교육도 빠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국가가 공포(公布)한 대책을 보면 그렇다. “트로이젠 사람들은 국가가 비용을 부담해 아테네 피란민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며, 아이들을 위해 교사에게 급여를 지불하겠노라.” 그리스 철학자 플루타르크가 남긴 기록에 보인다. 전란(戰亂) 속에서도 어린 세대의 교육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는 건 동서고금(東西古今)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극명한 예다.

 우리에겐 6·25전쟁 중의 피란학교가 바로 그런 경우다. 천막교실, 노천교실에서 공부할지언정 배우고자 하는 열망은 전쟁도 막지 못했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가 가야금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도 부산 피란학교 시절이다. 당시 경기중 3학년이었던 그의 눈에 비친 부산의 피란학교 모습은 어땠을까. 배추밭이나 무밭으로 쓰던 땅을 얻어 군용 천막을 세운 건 그나마 나은 편에 속했다. 처음엔 버스 지나는 길 옆 전봇대에다 칠판 하나 걸어놓고 아이들이 길바닥에 앉아 공부를 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였던 필립 제섭 무임소대사의 1950년 기록에 남한의 초등학교 교실 1만7561개가 지붕이 없는 노천교실이었다고 하니 가히 짐작할 만하다.

 다른 지역에서 학교가 옮겨 온 피란학교만 있었던 건 아니다. 한참 공부할 나이에 피란 나와 길거리를 배회하는 아이들을 보다 못해 피란지 인사(人士)들이 세운 피란학교도 있었다. 거제도 연초중의 전신인 연초전시중등학원이 한 예다. 어느 경우든 피란학교는 전쟁 통의 학생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심어준 배움의 터전이었음은 자명하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힘은 그 배움에서 나왔을 터다. 오죽하면 해외 원조로 만든 당시 교과서 뒷면에 ‘한층 더 열심히 공부해 한국을 부흥·재건하는 일꾼이 되자’는 표기를 했을까.

 북한의 포격 도발로 연평도를 떠나온 초·중·고 학생들을 위한 임시 학교가 그제 영종도 운남초등학교에 문을 열었다. 일종의 피란학교인 셈이다. 학생들이 충격에서 많이 벗어나 웃고 떠들며 정상 수업을 한다고 하니 다행스럽다. 어떤 어려운 여건에서도 교육의 명맥은 끊기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 대견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김남중 논설위원

▶분수대 기사 리스트
▶한·영 대역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