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다가오는 컴퓨터의 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컴퓨터공학자들이 자주 언급하는 '무어의 법칙'은 사실 과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법칙 아닌 법칙이다. 1960년대에 인켈사의 고든 무어 회장은 같은 크기의 실리콘칩에 담기는 트랜지스터 용량이 2년마다 곱절씩 커진다고 지적했다.이 지적은 지금까지도 실리콘칩의 발전상황에 부합한다.다만 용량배증의 주기가 2년보다 1년반에 가까운 것으로 드러났을 뿐이다.

10여년 전 386급 컴퓨터 한 세트를 장만하려면 최소 2백만원은 들었다.그런데 지금은 펜티엄급 컴퓨터가 백만원 전후의 가격으로 보급되고 있다.무어의 법칙이 설명하는 실리콘칩의 기하급수적 기능확장 덕분이다.

무어의 법칙이 계속해서 작용한다면 앞으로의 변화가 지금까지의 변화보다 더 엄청날 것이다.15년 후면 트랜지스터의 크기가 분자 수준에 이르고 다시 10년 후면 원자 수준에 이르리라는 계산이다.

분자 크기의 트랜지스터가 나오면 생명의 의미가 뒤집힐 것이고 원자 크기가 되면 존재의 의미가 흔들릴 것이라 하니 지금과는 전연 다른 세상이 되는 것이다.

모든 기하급수적 변화에는 한계가 있다.박테리아는 번식조건이 맞을 때 몇초마다 곱절씩 늘어나지만 환경에 적합한 숫자를 넘어서면 영양의 한계 때문에 번식속도가 줄어든다.무어의 법칙도 트랜지스터가 분자 크기에 이르는 2015년경이면 벽에 부딪치지 않을까 컴퓨터공학자들은 흔히 추정해 왔다.

무어의 법칙이 이보다 훨씬 빨리 한계에 이르리라고 전망하는 논문이 지난 달 '사이언스'지에 실려 화제다.더구나 필자가 다른 회사 아닌 인텔사에 근무하는 과학자다.폴 패컨 박사는 내년중 개발될 신제품을 끝으로 실리콘칩의 기하급수적 용량확장은 마감될 것을 예언한다.

지금의 첨단 실리콘칩에는 0.18마이크론의 굵기로 회로를 새겨넣고 있다.내년을 목표로 각국에서 개발중인 다음 단계 실리콘칩에서는 이 굵기가 0.13마이크론이 된다.그런데 이 굵기가 0.1마이크론 이하가 되면 트랜지스터 하나 안에 100개 미만의 원자만이 존재하게 되고,그 숫자의 원자를 가지고는 통계적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이 벽을 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재료와 새로운 개념이 필요하다고 패컨 박사는 본다.

컴퓨터의 발전이 실리콘이란 재료로부터 벗어나는 단계에서 수십년만의 획기적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그동안의 발전이 공학자들의 손으로 이뤄져 온 반면 당면한 변화에는 과학자가 나서야 한다는 것이 패컨 박사의 주장이다.기술모방(imitation)
의 단계를 거쳐 기술개혁(renovation)
의 단계에 접근하고 있는 우리 반도체산업이 다음 단계 변화 속에서 어떤 역할을 맡을지 주목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