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18) 일본의 경제 부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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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가 터지자 일본은 미군의 보급기지가 됐다. 군수품 생산은 2차 대전 패전국 일본의 경제를 되살렸다. 북한 지역 폭격도 일본에 있는 미군 기지에서 출격한 B-29가 수행했다. 사진은 한반도 지도를 보며 신의주 폭격 작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는 미 공군의 모습. 지도에는 일본에서 남한을 거쳐 북한까지 이어지는 항로가 그려져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차량재생창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산항 인근에는 차량을 다시 정비하고 수리하는 공장 이외에 총포재생창이라는 곳도 있었다. M1 소총을 비롯해 105㎜와 155㎜ 야포 등 국군이 미군에 의존해 사용하는 주력 무기들을 고치는 공장이었다.

 물론 크게 부서진 소총과 야포는 우리가 만질 수 없었다. 만져봤자 고칠 수 없을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총열에 이물질이 끼어들거나, 간단한 부속품이 빠져서 제대로 작동이 이뤄지지 않는 총포의 경우에는 우리가 즉시 고쳐서 사용하는 게 바람직했다.

 그런 총포재생창도 차량재생창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 규모도 처음에는 별로 크지 않았으나 전선에서 전투가 줄곧 이어지면서 차츰 커져 갔다. 역시 나는 총포와 관련이 있는 기술자들을 일본 오파마에 보내기도 했다. 일본 오파마는 차량 조립 생산 공장 이외에 저들이 과거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를 때 요코스카 인근에 해군 항공대를 육성했던 곳이라서 총포 관련 수리 기술을 배워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산 서면에는 그래서 군수품 공장이 제법 그럴듯하게 들어서고 있었다. 차량재생창·총포재생창 이외에 공병장비 재생창도 그곳에 있었다. 불도저를 비롯해 공병이 사용하는 모든 설비 중에 고장 난 것들은 부산의 재생창으로 바로 보내지곤 했다.

 지도창도 있었다. 6·25가 막 발발하고 난 뒤 우리 손에는 쥐여지지 않아 늘 학교 벽에 걸린 ‘대한민국 전도’를 보면서 작전을 구상해야 했던 국군에게 어느덧 나타난 그 5만분의 1 지도 말이다. 당초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통치하던 시절 이 땅을 실측(實測)해 만들었던 지도로, 나중에 미군이 이를 입수하면서 정밀한 좌표(座標)와 함께 컬러를 입힌 지도였다.

 나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늘 이 미군 지도 구하기에 골몰했다. 좌표에 의해 거리를 계산하고, 역시 좌표로 포격할 곳을 찾아낸다는 것은 당시의 우리에겐 획기적인 일이었다. 주먹구구식으로 적이 나타나면 총을 쏘고, 물러가면 쉬는 그런 전쟁으로부터 정밀하게 그어진 좌표를 읽으면서 야포를 때리고 공중사격을 이끌어내는 현대전으로 옮겨가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 바로 그 지도였다. 지도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었던 곳이 부산에 새로 자리를 잡은 지도창이었다. 그와 함께 주목을 받았던 곳이 광주에 세웠던 통신학교였다. 통신은 전선에서 당장 전투를 수행해야 했던 군인에게는 일종의 생명선과도 같았다.

 북한의 남침이 있기 전에도 국군은 기초적인 통신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지속적인 보강이 필요했다. 마침 다행스럽게도 일제 때 일본으로 유학으로 갔던 통신기술자들이 돕고 있었다. 이들은 국군을 위해 한글 전용 타이프라이터 자판을 만들어 통신을 시도했다. 영어로만 돼 있던 통신 자판을 하루 빨리 한글로 전환하는 작업이 당시로서는 매우 필요했던 까닭에 이들의 기여는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조응천 통신감이 이를 적극적으로 주도했고 통신학교는 부지런히 인재들을 양성해 냈다.

 일본에는 ‘조선특수(朝鮮特需)’라는 말이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일본 경제의 일대 부흥이었다. 그것도 과거 36년 동안 자신들이 강제 점령했던 한국 땅에서 전쟁이 일어나면서 생긴 특수였다. 사실 그런 일본의 경제 부흥 움직임은 굳이 일본 땅에 발을 내딛지 않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쓰고, 먹고, 타고, 만지고, 손에서 날려 보내는 것 모두가 일본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간단한 피복류와 쌀과 야채, 육류 일부를 빼놓고서는 대한민국 국군이 사용하는 모든 용품들은 미군의 돈으로 일본에서 만들어져 바다를 건너오는 것들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뒤 일본은 오파마에 있던 자동차 생산 공장을 놀리고 있었다. 패전국으로서 경제가 침체하면서 수요 자체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그 공장은 돌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당장 한반도에 상륙하는 미군들의 교통 수요를 맞춰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전쟁이 3년 동안 이어지면서 그 수요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랬다.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일본의 농업 또한 한국전쟁으로 거대한 전환기적인 변화에 직면했다. 보통 동아시아의 농업은 인분(人糞)을 기본 비료로 사용했다. 중국이나 일본 모두 마찬가지였다. 논농사를 제외한 다른 밭농사에는 인분을 썼다.

 그러나 일본의 농업은 미군이 먹을 채소를 기르기 시작하면서 인분을 쓰지 않았다. 미군이 기생충 감염에 노출될 것을 우려해 인분으로 키운 채소는 사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화학비료를 사용해 채소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비닐하우스 재배라는 기술도 배워 들였다.

 한국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미군, 일본 본토에 주둔 중인 미군 또는 연합군이 사용하는 채소를 대기 위해 일본 농업은 인분 농업에서 비닐하우스 농업으로 대변신을 했던 것이다.

 미군이 사용하는 식기와 플라스틱 제품 또한 일본 기업들이 대부분을 만들어냈다. 고급 식기인 자기(瓷器)류의 그릇은 물론이고, 일회용 비닐 또는 플라스틱 제품을 모두 망라해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일본 기업들이 이 당시의 경험으로 나중에 세계 굴지의 세라믹 생산업체로 발돋움하는 발판이 그때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과거 한반도를 강점했던 일본이 다시 일어나는 게 눈에 보였지만, 당장은 눈앞에 나타난 적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 제품이 판을 치는 현상을 더 심각하게, 그리고 아주 불편한 심기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전쟁 뒤에는 미군의 원조물자 형식으로 대한민국이 연간 화학비료 3000만 달러어치를 받아다 쓰는 처지였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와중에서도 농업을 위해 비료는 계속 들여다 써야 했는데 이 대통령은 가능한 한 이를 국산으로 대체키 위해 고민을 거듭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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