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스포츠100년, 2002년월드컵 공동개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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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이 지구촌 축구제전인 월드컵을 함께개최하는 것은 양국의 유대강화는 물론 세계평화와 남북한 분단의 평화적 해결에도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1996년 5월31일 스위스 취리히의 국제축구연맹(FIFA) 본부에서 전세계 보도진앞에 선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 겸 국제연맹 부회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고자신감 넘친 톤으로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의 소감을 밝혔다.

정 회장 옆에 나란히 앉은 일본축구협회 나가누마 겐 회장(현 일본월드컵조직위부회장)은 상대적으로 작아보였다.

결국 양국 공동개최에 그쳤지만 사실상 한국이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주위의 평가를 여실히 입증한 장면이었다.

`무모한 도전'이라는 안팎의 비난 속에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하나만 믿고뒤늦게 유치경쟁에 뛰어들어 빈틈없이 파고들기 시작한 지 불과 2년만에 한국은 '88서울올림픽 유치에 버금가는 쾌거를 이룬 것이다.

한국이 지구촌 축구제전인 월드컵 유치를 처음 검토한 것은 지난 89년 8월.

국민체육진흥공단의 사업보고에서 거론된 뒤 이듬해인 90년 정부 차원에서 검토했으나 이미 일본이 두어 걸음 앞선 상황에서 실현가능성이 적다는 여론에 부딪혀주춤했다.

한국의 월드컵 유치계획은 그러나 93년 정몽준 회장이 대한축구협회를 맡으면서꺼져가던 불길이 되살아났고 정 회장이 그해 6월 국제축구연맹을 방문, 월드컵 유치의사를 공식으로 표명하면서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94년 1월 유치발기인총회, 2개월 뒤 유치위원회 발족으로 2002년월드컵 유치경쟁은 거스를 수 없는 파고로 다가왔다.

이후 정부와 유치위원회, 대한축구협회가 총력을 다해 국제축구연맹 회원국을상대로 치열한 득표활동을 펴 96년 5월 마지막날 `공동개최이지만 사실상 승리한'역사적 쾌거를 달성한 것이다.

한국의 2002년월드컵 공동개최 유치에 결정적인 분수령이 된 사건은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FIFA집행부 입성.

정 회장은 94년 3월 있은 아시아축구연맹(AFC) 총회에서 아시아에 1자리 배정된국제축구연맹 부회장 후보 경선에 뛰어들어 일본의 무라타 다타오, 카타르의 함만,아시아올림픽평의회(AOC) 의장인 쿠웨이트의 세이크 파드 등 강력한 라이벌을 물리쳤다.

아시아연맹 대표로 당당히 국제축구연맹 부회장에 오른 정 회장은 2002년월드컵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노회한 군주' 주앙 아벨란제 FIFA회장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 아벨란제를 목표로 한 외곽 포위전략을 폈다.

일본이 바로 아벨란제를 등에 업고 월드컵 유치경쟁에 뛰어들었기 때문.

정 회장은 아벨란제와 `정적관계'에 있는 유럽축구연맹(UEFA) 레나르트 요한손회장과 손을 잡았고 요한손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아프리카, 아벨란제 우산 밑의 남미와 차별성을 띠려는 북중미카리브해연맹(CONCACAF) 회원국들을 공략했다.

당초 기대대로 이들을 친한세력으로 규합한 정 회장에게는 뒤늦게 출발했지만 일본을 충분히 추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일찌감치 정지작업을 끝냈다고 안이한 자세를 보이던 일본이 한국의 거센 추격에 당황하기 시작했고 개최국 결정 11개월 여를 남긴 95년 7월 고노 외상이 공동개최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대세가 넘어간 사실을 인정했다.

96년 5월30일 국제축구연맹 집행위가 `2002년월드컵은 만장일치로 한국과 일본양국에서 공동개최되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결론내린 것을 두고 한국이 사실상 승리한 싸움이라고 평가받는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사상 첫 2개국 공동개최의 아이디어가 바로 친한세력의 `대부'인 요한손 유럽연맹 회장에게서 나온 것이고 한.일 양국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과거문제로 여전히 경쟁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특수성을 감안할 때 국제축구계가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지 못하고 가장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정황이 이를반증한다.

[서울=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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