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의 정의로운 권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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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호 31면

외국재판제도 연구를 위한 해외출장차 덴마크 대법원을 방문했던 때의 일이다. 대법원 하면 으레 웅장한 건물, 삼엄한 경비, 엄숙함 같은 그림들이 떠오르지만, 덴마크 대법원은 그런 통념과는 사뭇 달랐다. 약속시간, 쭈뼛거리는 마음을 추슬러 출입문 앞에 섰다. 살며시 문이 열리더니 단아한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신다. 인자한 미소에 긴장으로 경직됐던 나그네 마음이 좀 풀리는 듯했다. 대법관 집무실로 안내됐다. 맙소사! 방문객을 마중한 할머니가 뵙기로 한 바로 그 대법관이었다. 그녀를 대법관 비서 정도로 여겼던 한국 판사로서는 당혹스러웠다. 우리 문화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었던 그 소탈함. 덕분에 그분과 나눈 두 시간의 대화는 즐거움 자체였다. 특유의 유머와 다정함이 섞인 지혜의 설파에 큰 배움을 얻었다. “정의로운 권위”는 그 자체 아우라에서 절로 뿜어져 나온다. 수하를 여럿 거느리고 위세를 부려본들 결코 이룰 수 없음을 다시금 느꼈다. 누굴 시키지도 않고 손수 방문객을 맞이하는 자연스러움 역시 그런 자신감의 발로로 보였다.

다음 주에 인접한 다른 나라의 법원 방문 일정이 이어졌다. 그날은 오후 방문이 예정돼 있었다. 위치도 파악할 겸 아침에 서둘러 나서다 보니, 약속시간보다 훨씬 이른 오전에 법원 청사에 도착한 것이 화근이었다. 마침 큰 법원이고 해서 구내 시설을 둘러보다 보니 도서관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도서관은 외부인 출입이 통제된 장소였다. 안내 데스크 직원에게 “오후에 이곳 법원을 공식 방문할 한국 판사인데 마침 시간이 남아 도서관 내부를 구경할 수 있겠느냐”고 문의했다. 안내 직원은 난감해하며 어디론가 전화를 해 사람을 불렀다. 총총걸음으로 달려온 사람은 필자가 만날 예정인 법원장의 로클러크(law clerk). 그녀는 꽤 화난 듯 보였다. 약속시간이 오후 1시30분인데 왜 시간도 지키지 않고 오전 11시에 일찍 왔는지 따졌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키며 “당장 여기서 꺼지라(Get out of here, right now!)”고 외쳤다. 건물 밖으로 나가라는 취지였다. 건물엔 일반 출입이 자유로운 영역도 있을 터, 그처럼 매몰차게 이방인을 내몰고 나서야 직성이 풀리는 듯 돌아서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예의 없이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공연히 나라 망신을 시킨 게 아닌지 우울한 기분에 길거리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법원에 갔다. 법원 개요를 설명한 사람은 우리를 내쫓은 바로 그 여성이었다. 기왕에 보내준 서면질문에 꽤나 성실하게 준비해 설명해준 것으로 그나마 위안이 됐다. 궁금하던 차에 어떤 연유로 법원에 근무하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어투로, 우수한 법과대학 졸업생들이 로클러크로 근무할 수 있는데, 법원장 로클러크는 그중에서도 더 우수한 사람이라는 점, 10년쯤 지나면 판사로 임명될 수 있다는 점, 자신은 조만간 판사 임관 신청을 할 것이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아무리 이역만리 타국이기는 하지만 조만간 동업자 반열에 오를 사람이기에 한마디 거들고 싶은 생각에 물어보았다. ‘판사가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가’를. 답변을 우물거리는 틈에 말을 이어보았다. 판사에게 제일 중요한 자세는 바로 ‘열린 마음’이라고.

그렇다. 판사의 마음이 닫혀서는 좋은 재판이라는 일은 아예 언감생심일 것이다. 편견을 영어로 ‘pre-judice’라고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게다. 재판이라는 것을 하기도 전에 이미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라면 그 생각은 편파적일 가능성이 크다. 상반되는 다른 이야기들, 이 말 저 말을 일단 잘 들어보고 무슨 사정인지 꼭 궁금하지 않더라도 귀찮음을 물리치고 확인에, 재확인을 거듭하는 그런 과정이 재판이다. 그때 자만심으로 마음의 문이 닫히면, 잘 묻고 잘 듣는 경청과 배려의 재판은 남의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은 비단 재판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일상의 인생 역시 그런 마음자세로 인해 더욱 향기롭고 풍성하게 번성할 것이다. 누굴 대할 때든 배려와 경청, 열린 마음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 상대가 흉악범이든, 소수자든, 이방인이든 간에.

그녀는 무슨 눈치를 챘는지 그날 오전엔 자기가 너무 바빠서 그랬다는 둥 변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법원장 면담 뒤 오후 내내 예정에도 없던 도서관 투어 일정을 마련하더니, 지겨울 정도로 그 도서관을 실컷 구경시켜 주는 바람에 발품깨나 팔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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