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 대원 20여명 매장 추정지 찾았다

중앙일보

입력

'실미도 684 부대원'들의 매장 추정지가 처음으로 확인됐다고 16일 한겨레신문이 보도했다.

이들은 1971년 8월 23일 인천 실미도에서 북파공작 훈련을 받다 탈출해 서울에서 군과의 총격전 끝에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신문은 당시 경기도 벽제시립묘지에서 매장일을 했던 이동식(84)씨의 증언을 인용해 이같이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이씨는 "71년 여름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관 20여개를 나를 포함한 40여명의 인부가 시립묘지에 묻었다"며 "나중에 묘지관리소장으로부터 '배타고 인천으로 건너와 버스를 빼앗아 타고 서울로 쳐들어가다 죽은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가 지목한 장소는 벽제 묘지 관리소에서 북쪽으로 500여m 올라간 지점의 도로에서 60여m 떨어진 산기슭이다. 이는 71년 부대원들의 주검을 처리했던 임모 당시 공군본부 인사처 과장이 지난해 3월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에 출연해 "운전병까지 모두 위장해서 경기도 벽제리 묘지로 가 주검을 전부 가매장했다"는 증언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이씨는 "아침에 출근해보니 누군가 이미 매장지 옆에 관을 가져다 놓았는데, 썩은 냄새가 심해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며 "줄을 맞춰 관 크기대로 땅을 판 뒤 봉분을 만들고 먹으로 숫자가 적인 말뚝을 박았다"고 말했다. 또 "관은 얇은 판자로 대충 만들어 흐늘흐늘했다. 1m 정도 땅을 파라고 했지만 주인도 모르는 관이기에 관을 덮을 만큼만 땅을 파고 묻었다"고 자세히 말했다.

특히 "오전 11시쯤 군용트럭이 하나 오더니 사복을 입은 사람 서너명이 서너개의 관을 더 가져왔다"며 "인부들이 '누구보고 또 묻으라는 거냐'고 화를 내자 이들이 '당신들이 매장하는 사람 아니냐? 이 관들도 (지금 묻고 있는 관들과) 같은 패들이다'라고 말해 함께 묻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당시 실미도 부대 소대장이었던 김방일(60)씨는 "탈출을 시도한 24명 가운데 실미도에서 죽은 2명과 버스에서 죽은 16명은 8월 24일 서울 대방동 공군본부로 옮겨졌다"며 "추가로 실려온 관은 인천에서 죽은 2명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나머지 4명은 이듬해 군사재판에 회부돼 사형이 집행됐다.

현재 묘지를 관리하는 묘적부에는 부대원들 매장 기록은 없으며, 매장 추정지에는 85년에 묻힌 김모씨 등 3명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김씨의 아들(38)은 "당시 묘를 관리하는 사람이 '아버지 묫자리 바로 위에 '인천반란사건'으로 죽은 사람 스무명 정도가 묻혀 있어 그 자리에는 묘를 쓸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며 "당시에는 그 자리에 가시덤불이 우거진 채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22일 매장 추정지를 돌아본 국방부 실미도 사건 특별조사단은 "이씨가 지목한 장소가 30m 간격을 두고 벌엊 있어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추가 제보가 들어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관계기관의 협조를 거쳐 발굴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결과를 낙관하기만은 어렵다. 이 일대 묘들이 98년 8월에 쏟아진 집중호우로 상당부분 유실됐기 때문이다. 실미도 부대원 유가족 임홍빈(39)씨는 "국방부도 몰랐던 매장지가 증언을 통해 확인됐으므로 국방부는 성의있는 답변을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실미도 유가족 11명은 지난 10일부터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매장 추정지에 대한 조속한 발굴을 촉구하는 밤샘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디지털뉴스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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