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5년마다 국토는 멍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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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중국 동부 해안과 동북3성, 한반도, 일본 서남해안의 도시군을 묶는 황해연합은 콘텐트와 입지에서 유럽연합(EU)을 능가하는 경제공동체가 될 수 있다. 그 출발은 인천과 칭다오(靑島).다롄(大連) 등 세 항만도시의 도시연합과 공동 해상공단이다. 다음 단계로 한반도-랴오닝 (遼寧)성-산둥(山東)성 경제공동체를 거쳐 30~40년 안에 황해도시연합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건축가이자 도시설계가 김석철 교수가 최근 펴낸 책 '희망의 한반도 프로젝트'에서 제시한 웅대한 구상이다. 한반도와 중국의 해안 도시들을 거미줄처럼 연결시키고 거기서 다시 중국 내륙으로, 일본으로, 태평양으로 뻗어나가는 기운이 힘차다. 그의 프로젝트는 한반도 공간구조 재조정으로 이어진다. 국토개발의 그랜드 디자인이다. 이 분야에는 까막눈이라 나로선 어느 정도 현실성 있는 제안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50년을 내다보는 장기적 안목의 국가발전 전략, 그리고 세계 지도를 머릿속에 담고 중국 대륙과 태평양을 넘나드는 상상력과 내공의 깊이에는 감탄불금이다. 그의 역저가 우리의 중구난방 땜질식 개발정책과 국토 전반의 마구잡이 개발을 바로잡는 중요한 단초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나라에도 국토개발 청사진이 없는 것은 아니다. 2000년 1월 확정한 제4차 국토종합계획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건 이미 휴지조각이나 다름없게 됐다. 국토개발의 중심축은 이제 공주.연기 복합 행정도시로 바뀌게 됐으니 기존의 계획은 수정이 불가피하다. 4차 계획도 수도권 밀집 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국토의 균형개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 정권의 수도 이전.분할 논리와 다르지 않다. 잘못된 계획이라면 고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과연 현 정권이 4차 계획을 어느 정도 깊이있게 검토한 뒤 걷어찬 것인지 묻고 싶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바뀐다면 그게 무슨 국토개발 계획인가. 건교부 홈페이지에는 '4차 국토종합계획'의 거창한 그림이 여전히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현실 정치의 희생물인 셈이다. 클릭할 때마다 주먹구구 국토행정의 실상을 고스란히 증언하는 듯하다. 국토개발에 대한 종합 설계도가 부실한 데다 각 지자체는 또 제각각의 논리에 따라 짓고 부순다. 그 결과가 지금 만신창이로 신음하고 있는 우리의 국토 모습이다.

체계적이고도 일관성 있는 국토개발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정치공약에 의한 정치적 사업이다. 그동안의 여러 사례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말썽 많은 새만금과 현재진행형인 수도이전 모두 대통령선거 공약사업이다. 애물단지가 돼버린 몇몇 지방 공항과 지방 공단들도 역시 선거공약의 산물이다. 국토가 마치 자신의 텃밭이라도 되는 양 표와 바꿔치기한 것이다. 저질러놓곤 나몰라라다. 정권이 끝나면 문책할 방법도 없다. 텅빈 공항.공단과 새만금의 장본인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다. 삼보일배의 소란 속에서도 그는 거명조차 되지 않았다.

더욱 한심한 것은 숱한 실패를 경험하고도 똑같은 길을 답습하는 우리 사회의 우매함이다. 수도분할 우여곡절도 결국 표놀음 아니던가. 서울공항 이전 논란 등 후속 수도권 대책이랍시고 들먹이는 작금의 논의들은 정치놀음의 극치다. 원칙도 없고 설계도 없다. 표를 좇아 대책들이 춤추는 사이 국토는 멍들어 간다.

수도분할 문제가 원점에서 재검토되는 게 최상책이지만 현재의 흐름에선 기대난망이다. 그렇다면 실패한 정책에서 교훈이라도 챙겨 최소한 되풀이되는 실패는 막아야 옳다. 그 첫 단추는 정치사업의 원천봉쇄에서 찾을 수 있다. 대선이든 총선이든 각종 선거에서 국토개발을 표와 바꾸려는 행태, 즉 정치사업 공약을 못하도록 막는 방안이 강구돼야 한다. 국토개발계획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초정부 기구에 맡겨 정권의 교체와 상관없이 미래지향의 설계에 전념토록 하고, 정부는 설계에 따른 집행만 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면 좋겠다.

하나밖에 없는 국토요, 자손만대가 살아가야할 삶의 터전이다. 천 년을 관통하는 국토개발의 철학과 지혜가 담긴 확고한 설계가 그려져야 하고, 설계에 맞춰 차근차근 가꿔가는 인내심과 의지가 요구된다. 더 이상 정치재미를 위한 제물로 멋대로 휘젓게 방치해선 안된다. 정권의 임기는 고작 5년이다. 5년마다 대선공약에 따라 국토계획이 바뀌어지는 왜곡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허남진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