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창고이자 쉼터,소프트 파워 시대...문화 외교의 전진기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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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호 20면

사울의 외국 문화원

“변변한 영어학원이 없어 영국문화원의 ‘회화클럽’을 찾았고, 시대 정신을 맨살로 표현하는 유럽 영화의 묘미를 맛보러 프랑스문화원 지하 1층 상영관 ‘살 드 르누아르’를 찾았습니다. 문화원 드나들기는 대학생활의 활력소였죠.” 1970년대 중반 대학을 다닌 한 외교관의 회상이다. 그뿐일까. 9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영화계는 활짝 피어났다. 영화감독 박찬욱, 정지영·박광수·김홍준·강제규 등이 부상했고 영화평론가 정성일·양윤모,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전양준 같은 이들이 영화계 토대를 굳건히 다졌다.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드나든 이른바 ‘시네 키즈’다.

독일문화원은 한국 극예술 분야의 자양분 역할을 했다. ‘프라이에 뷔네’(자유 무대)는 대학 독문학과 출신 젊은이들이 문화원을 중심공간으로 해 만든 학생극단이다. ‘관객 모독’과 ‘빨간 피터의 고백’ 등 독일 희곡들을 번역해 무대에 올렸다. ‘프라이에 뷔네’의 독일 문제작 소개로 70~80년대 한국 연극계는 풍성해졌고, 당시 연극인 들은 목마른 시대를 적시는 역할을 했다.미국문화원은 다른 이미지로 다가온다. 82년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 85년 대학생들의 서울 미 문화원 점거농성 사건으로 반미 운동의 상징처럼 각인됐다.

한국 사회도, 국제사회도 변했고 서울의 외국 문화원도 변했다. 10여 년간 이어진 영어 열풍에 힘입어 영국문화원은 어학 전문기관을 방불케 한다. 수강생 대기자가 늘어서 있을 정도다. 세금 문제도 미묘하게 걸려있다. 외교기관의 영리활동을 어떻게 보느냐가 관건이다. 상호주의 원칙 때문에 우리 문화원의 해외 활동에 영향을 주다 보니 서로 빡빡하게 하진 못하는 분위기다. 나머지 문화원의 분위기는 고즈넉하다. 그렇다고 물밑 활동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소프트 외교가 중시되는 시대 흐름의 여파다.

외교부 관계자는 “‘문화 외교’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게 프랑스의 변신 노력”이라고 말했다. 최근 불어권이 쇠락하고, 관광객 수도 이웃나라 스페인에 뒤지다 보니 낮은 자세의 문화 외교를 부쩍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26일 만난 로르 쿠드레 로 프랑스 문화원장도 “프랑스 정부 차원에서 전 세계 문화원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 중”이라고 했다. 요체는 문화원과 대사관 문화과를 통폐합해 주재국 국민들의 접근성을 높이는 것이다.

서울에 있는 외국 문화원은 공식적으로 7곳이다. 외교 문서를 통해 양국 정부가 인증한 기관인데, 미국·독일·영국·프랑스·일본·중국·이탈리아가 설치해 놓은 상태다. 동남아와 아프리카·중동·남미 국가의 문화원은 없다. 그나마 국내외 민간 기업이 설립한 문화원이 6~7개 있을 뿐이다. 문화원 설립은 각 나라의 경제적 형편이나 외교 관계 수준 등에 따라 결정되지만, 다른 한편으론 한국 외교의 주변 4강 편중 및 선진국 문화 편중 현상을 드러낸다. 우리의 해외 문화원은 어떨까. 79년 일본의 도쿄 신주쿠에 한국문화원을 개설한 이래로 12개 나라(일본·미국·프랑스·독일·러시아·베트남·아르헨티나·영국·중국·폴란드·카자흐스탄·나이지리아), 16개 도시에서 문화원을 운영하고 있다. 프랑스는 130개국, 209개 도시에서 문화원을 운영하고 있다. 문화원의 존재는 국가의 품격·위상과 문화 외교의 수준을 말해주는 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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