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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벽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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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동양 제1의 그림이다." 화가이자 미술사가인 근원(近園) 김용준은 '조선미술대요' 첫머리에 당당한 목소리로 이렇게 적어놓았다. 근원은 고구려 벽화를 보고 있으면 한 폭의 그림을 대하는 맛보다 쏟아지는 폭포 앞에 선 것처럼 신비스러운 박력을 느끼게 된다고 썼다.

정말 그러했다. 장엄한 폭포였고 박력 넘치는 파노라마였다. 지난해 6월 평양 언저리 벽화무덤을 둘러본 중앙일보 취재진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고구려에 와있는 기분이다. 몇 번을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함께 갔던 최종택 고려대 교수는 "벽화를 그리던 화공이 조금 전에 붓을 거두고 나간 듯 필선이 선명하다"고 감동에 떨며 말했다. 유네스코가 2004년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고구려 고분벽화의 힘이다.

당시 남쪽 기자를 뒷바라지한 북쪽 일꾼은 이승혁 문화보존지도국 유물처장이었다. 벽화면 벽화, 유물이면 유물, 질문에 막히는 법이 없는 이 유물처장은 '걸어다니는 컴퓨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일성종합대학 고고학과에서 고구려사를 전공한 그는 무덤벽화를 애인처럼 대했다. 세월을 못 이겨 자꾸 망가지는 벽화, 아직도 발굴의 손길을 기다리는 고분 걱정에 마음 편할 날이 없다고 했다. 돈이 없어 보존처리를 하지 못하는 벽화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지만 300기 이상 남아 있을 것으로 어림하는 미발굴 고분 때문에도 잠이 안 온다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남북 학자가 올해 안에 평양 인근의 고구려 고분을 함께 조사하기로 했다는 고구려연구재단의 발표는 훈훈한 봄바람 같다. "고구려에는 휴전선이 없다"며 "남과 북이 손잡고 무덤벽화의 보존에 애쓰자"던 이승혁 유물처장이 제일 기뻐할 소식이다. "고구려는 남과 북을 하나로 만드는 마음의 고향"이라던 그에게 우리 모두는 고구려의 후손으로 형제였다.

남포시 강서구 덕흥리 무덤벽화에는 은하의 강을 사이에 둔 견우와 직녀 모습이 그려져 있다. 애틋한 그들의 사랑과 이별노래가 들려올 것처럼 남녀의 자태는 생생하다. 이제 남쪽 학자와 북쪽 학자가 견우와 직녀가 그렇듯 고구려 고분 안에서 만난다. 남북이 함께 그리워하는 한민족의 원형이 거기 있다.

정재숙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