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60년] 소양강에서 일으킨 국군 (198) 1952년 여름, 갑작스런 결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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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은 무기도, 보급도 부족한 상황에서 오로지 나라를 지킨다는 일념으로 부지런히 전선으로 나아가 적을 맞아 싸웠다. 6·25전쟁이 터진 뒤 젊은 장정들이 자진 입대를 위해 당시 전라남도 광주의 징병 검사소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있는 장면이다. 종군작가인 고 이경모씨의 작품으로 『격동기의 현장』(눈빛)에 실린 사진이다.

포병은 한반도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던 무렵에는 그야말로 현대전의 총아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공중과 지상을 연결하는 입체적인 작전도 당시 전투를 벌이던 부대의 현대화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이기는 했지만, 지상에서 벌어지는 작전에서 전투력의 강약(强弱)을 판단하는 데는 포병의 능력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다.

 다시 창설한 국군 2군단의 의미는 이 같은 포병 의 양성과, 당시로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했던 155㎜ 야포를 확보해 운용하는 능력을 어떻게 갖췄느냐는 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아주 운이 좋게 미군으로부터 그 155㎜ 야포를 지원받았고 역시 미군의 계획에 따라 그런 야포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포병 병력을 육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 포병은 아주 우수했다. 보병(步兵)은 가늠자와 가늠쇠를 활용해 적을 정확하게 사격해야 하지만, 포병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밀한 계산을 할 줄 알아야 하는 병과(兵科)다. 원하는 지점으로 포탄을 정확히 날려보낼 궤도(軌道)와 포탄에 장착할 화약의 양을 정확히 계산해야 오차(誤差) 없이 정확하게 적을 타격할 수 있다. 관측을 통해 포격 초기 탄착(彈着) 지점을 파악해 오차 수정도 해야 한다. 게다가 정해진 시간 안에 정확하게 포탄을 날려 보내 적진(敵陣)을 파괴하려면 짧은 시간에 이를 계산해내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다른 어떤 병과의 장병보다 훨씬 계산 능력이 뛰어난 것은 물론, 신속하게 야포를 전개(展開)한 뒤 다시 거둬들이는 운용 능력까지 갖춰야 했다. 국군 포병은 우선 포 사격 면에서 아주 빼어난 능력을 보였다.

 내가 이끌던 2군단을 지원하기 위해 미 포병대대를 이끌고 합류한 이가 메이요 대령이었다. 당시 그는 2군단 예하 5포병단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2군단에 배속된 국군 포병대대가 펼치는 포격술을 나와 함께 자주 관찰했다. 그는 조금의 과장도 없이 늘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한국군 포병은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특히 포탄의 궤도와 탄착 지점을 계산해 내는 수학 능력이 아주 우수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군 포병이 미군 포병보다 포격 능력에서는 더 낫다.”

 나는 그런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포병의 운용 능력을 판단할 때 단순히 사격술만을 갖고 따질 수는 없다. 미군은 그보다는 훨씬 체계적인 사격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사격 전에 치밀한 관측을 했고, 과감한 포격을 퍼붓기 전에 미리 정교한 포병 통신 체계를 구축했다. 그저 막강한 화력과 그에 결코 뒤지지 않는 막대한 포탄 비축량으로 적을 그대로 밀어붙이기만 하는 포병은 아니었다. 그들은 아군이 노리는 표적에 포탄이 정확하게 떨어지도록 하고, 일사불란(一絲不亂)한 지휘체계를 구성해 포탄을 낭비 없이 효과적으로 발사하는 ‘시스템’을 운용했던 것이다.

 국군 포병을 지켜보면서 메이요 대령이 한 칭찬은 그저 사격술에 국한한 것이었던 걸로 생각한다. 국군 포병은 그의 칭찬대로 수학적인 계산 능력이 아주 뛰어났다. 포탄이 날아가 적진을 때리는 단순한 결과만을 두고 보면 그의 말은 맞다. 그런 칭찬은 그 뒤에도 여러 차례 들었다. 미군 고문관들이나, 함께 적을 맞아 싸우던 미군 포병들도 늘 그런 말을 했다. “국군의 사격술이 매우 뛰어나다”는 칭찬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배울 것은 사격술만이 아니었다. 포병을 어느 곳에 배치하고, 가장 효과적인 포격 지점을 찾고 탄착점의 오차를 교정하기 위해 어떻게 적진을 관측하며, 효과적인 포병 지휘를 위해 자체적인 통신망을 어떻게 구성하는가를 배워야 했다. 다행히 국군 포병은 이를 잘 따라 배웠다. 우리보다 우수한 미군의 포병 전술을 제대로 익혔던 것이다.

 빈 곳을 채우는 게 학습(學習)의 궁극적인 목표다. 내가 지니지 못한 것, 내게 갖춰지지 못한 것, 내 형편으로는 채울 수 없던 것을 나보다 나은 상대에게서 배우는 게 학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장단(長短)을 잘 알아야 한다. 제 스스로 어디가 부족하고 무엇을 갖추지 못했는가를 잘 알아야 학습의 효과는 많이 증가할 수 있다. 당시 국군은 여러모로 미군에게 뒤처졌지만 그 학습의 열망(熱望)과 능력은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국군이 미군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사격술은 결코 뒤지지 않았지만, 포병을 전체적으로 움직이는 시스템을 우리 안에 정착시키기 위한 배움의 과정이 아직 많이 필요했던 것이다.

 나는 2군단을 4개월 정도 지휘한 뒤 곧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 아주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다. 내 나이 만 32세를 4개월 정도 남겨 둔 52년 7월 말 나는 그런 통보를 갑자기 받았다. 매우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육군을 총지휘하는 그런 자리를 나이 젊은 내가 맡게 된 것이다.

 아직 산이 첩첩이 가로놓여 있었다. 갈 길은 멀고, 임무는 매우 막중했다. 휴전회담이 벌어지고 있던 당시의 전선은 소강 상태였다. 격렬한 고지 쟁탈전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역시 전선 부근에서만 싸움터가 형성되는 그런 국면(局面)이었다. 참모총장으로서 수행해야 할 최대의 임무는 국군을 이른 시간 안에 강군(强軍)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내가 어떤 경로로 갑자기 육군참모총장으로 임명이 된 것인지는 나중에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2군단 지휘관으로서 전선의 중공군과 일전(一戰)을 벌일 생각에 골몰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육군참모총장으로 발령이 났으니 곧 대구로 가야 한다”는 통보를 들은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부관이 그랬는지, 미군 고문관이 알려준 것인지는 지금도 기억이 없다. 느닷없이 그런 통보를 받은 것이다.

 나는 소토고미를 떠나면서 내가 육군 최고 지휘관에 취임한 뒤 무엇을 할 것인지를 따져봤다. 우리 국군에게 가장 부족한 것, 시급히 채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했다. 역시 미군의 도움으로 하루빨리 중공군과 북한군 모두와 맞설 수 있는 강한 군대를 육성하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다행히 그해 4월에 다시 만든 2군단의 핵심 작업은 전력을 증강하는 일이었다. 육군참모총장에 올라선 뒤 해야 할 일의 맥락도 그와 같았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머물던 부산으로 향했다. 참모총장에 올랐다는 기쁨보다는 그런 중요한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감이 더 컸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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