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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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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땅값은 땅에서 나왔지만 둘은 엄연히 다르다. 땅값은 변하고 땅은 변치 않는다. 땅값은 사람에 속하고 땅은 자연에 속한다. 사람의 지위를 바꾸는 힘은 실로 인간세상 속에서 줄기차게 변하는 땅값이다. 땅 자체는 그저 저만치 혼자 누워있을 뿐이다.

이헌재 부총리가 고위 공직자로서 발휘하는 실력의 원천은 그가 수십년간 갈고 닦은 개인의 내공일 것이다. 하지만 자연인 이헌재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킨 힘은 24년간 묻어 놨던 땅값의 변화였다. 반면 나무나 곡물을 생산해 내는 그 땅의 자연적 능력은 거의 변하지 않았으리라. 순서론 땅이 먼저여도 가치에선 땅값이 더 중요하다.

땅과 땅값처럼 순서와 가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일과 돈이다.

돈은 일에서 나왔다. 일(노동)의 성과를 서로 교환하는 과정에서 돈이 만들어 졌다. 그래서 돈은 일을 의미하며, 일 아닌 곳에서 나온 돈은 정당하지 않다는 통념이 생겨났다.

그런 통념이 지배하던 시대에선 불로소득이 죄악시됐다. 관료의 가난이 칭송받았다. 청빈(淸貧)이라 했다. 서양엔 청부(淸富)윤리가 있었다. 돈은 부지런하고 성실한 사람이 모은다는 사회적 믿음이었다. 불로소득이 지탄받고 노동과 돈이 일치한다고 믿는 사회의 통합된 의식이었다. 분열없는 의식이었다. 소박하지만 행복감도 높았다.

요즘은 돈의 세계와 일의 세계가 따로 노는 가치분열의 시대인 듯하다. 둘이 분리되자 사람들은 일보다 돈의 가치를 존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일터에서 일은 일대로 하면서 또 다른 '돈터'를 찾아 돈벌이에 나서는 게 가치분열 시대의 풍속도다.

돈의 가치가 지배적인 시대엔 윤리도 조금씩 바뀐다. 우선 공직자들이 1년 사이에 돈 모은 것 자체를 탓할 순 없을 듯하다. 월급이나 합법적인 돈벌이 공간인 주식을 통해 돈을 불렸다고 비판할 일도 아니다. 전통적인 도덕 기준으로 공직자의 돈 문제를 시비하기엔 사회의식의 변화가 너무 크고 빠르다.

다만 돈의 시대일수록 엄격해야 할 게 있다. 돈벌 기회의 공평성과 돈 흐름의 투명성, 불법 돈벌이에 대한 철저한 응징의 정신이다. 공평성과 투명성과 합법성은 돈의 시대를 성립케 하는 3대 조건이다. 이게 부실하면 돈은 좋아하면서도 돈번 사람은 싫어하는 자기분열의 힘든 삶을 살아가야 한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