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판 중심주의' 형사재판 해보니…] 피고인 할말 다해…무죄율 높아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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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내겠다""제출하라"

수사기록 제출을 놓고 법원과 검찰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최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강동시영아파트 재개발 비리 관련 피고인 첫 공판에서 검찰은 "수사기록과 검찰이 수집한 증거를 재판부에 제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수사기록을 미리 제출할 경우 공범들의 범죄 사실이 흘러나가 도주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와 함께 검찰은 법정에서 기록을 공개, 유죄 공방을 벌이는 것이 공판 중심주의 정신에 맞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에 맞서 법원은 수사 기록을 넘길 것을 검찰에 공식 요청했다.

도입 2년을 넘긴 공판 중심주의 재판의 현주소와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알아본다.

#장면 1.

2002년 7월 서울중앙지법 형사 법정.

"피고인, 검찰에서 진술한 내용이 사실과 틀림없고 조서를 다 읽어보고 서명 날인한 것 맞지요?"(검사)

"네."(피고인)

"변호인은 더 변론하실 내용 없습니까?"(재판장)

"서면으로 대신하겠습니다."(변호인)

#장면 2.

2005년 2월 서울고법 형사법정.

"피고인과 증인은 서로 쳐다보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해보시죠."(재판장)

"내가 150억원을 받은 적이 없는데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박지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아, 분명히 박 장관님께서 받으셨잖아요."(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

◆ 말 많아진 재판=형사재판이 바뀌고 있다. 예전(장면1)에는 검찰이 제출한 수사기록 위주로 진행됐다. 피고인조차 재판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검사.피고인.변호인이 활발하게 공방을 벌여 유.무죄를 가리는 재판(장면 2)이 점차 자리잡아 가고 있다.

2001년 사기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김모씨는 "판사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검사나 변호사 모두 묻는 말에 '예, 아니오'로 짧게 말하라고 다그치는 통에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김씨와 같은 불만을 갖는 사람은 많이 줄었다. 수사기관이 제출한 증거나 증인에 대해 변호인은 물론 피고인이 반박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피고인이 자신의 주장을 직접 말하는 대신 변호인의 긴 질문에 짧게 대답하는 관행이 남아 있고▶객관적 물증보다는 진술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으며▶양형 심리가 불충분한 것 등은 개선돼야한다는 지적이다.

◆ 공판 중심주의 논란=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는 "피고인이 검찰에서 자백을 한 뒤 판사 앞에서 진술을 뒤집을 때는 황당하다"면서 "검찰 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로 피고인들이 빠져나갈 구멍만 커졌다"고 말했다.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을 처벌하지 못하면 그 피해가 궁극적으로 선량한 다수 국민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검찰은 우리와 다른 법체계를 가진 미국 등에서 채택하는 제도를 무리하게 도입해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법원은 공판 중심주의가 형사재판의 기본이라는 입장이다. 공판 중심주의를 명문으로 선언한 법 규정은 없으나 형사소송법의 구두 변론주의(31조 1항).직접 심리주의(316조) 등이 공판 중심주의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검찰 일부에선 수사와 유죄 입증이 어려워진다는 이유로 비판하지만, 공판 중심주의는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뒤늦게나마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비용 증가는 국민의 몫= 공판 중심주의가 강화되면서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판사.검사.속기사 등 인력을 충원해야 하고 법정도 더 지어야 한다. 법정 한개 짓는 데는 1억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하다.

대법원은 해마다 40~50명의 판사를 형사 재판부에 추가 배치하고 있다. 사건을 심리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재판이 장기화하는 것도 피할 수 없다.

경희대 서보학(법학) 교수는 "철저한 공판 중심주의를 실시하고 있는 미국에서도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비판적 견해가 있다"면서 "하지만 피의자.피고인의 인권을 보호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공판 중심주의는 이제 막 물꼬가 트인 단계"라면서 "법정 공방이 유.무죄 판단 근거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점에선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만큼 수사기관의 인식 변화와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 정비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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