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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욕(無慾)에 대한 예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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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설 쇤 다음날 충남 보령시 관촌 솔밭을 찾았다. 소설가 명천(鳴川) 이문구(李文求.1941~2003)의 명작 '관촌수필'의 무대로 그의 2주기를 맞아 술 한 잔 올리기 위해서다. 태어나고 자란 그 솔밭에 한 줌의 재로 뿌려져 명천은 저 하늘로, 대천 앞바다로 두둥실 흩날려가 그곳엔 아무 흔적도 없다. 그렇게 텅빈 관촌 솔밭에는 명천에게 올릴 한 잔 술과 꽃송이의 걸음이 오늘도 삼삼오오 끊이지 않고 있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말고 화장해 관촌에 뿌려줄 것이며, 내 이름을 건 어떤 기념사업도 펼치지 말라." 위암으로 꺼져 가는 마지막 숨결을 붙잡고 남긴 유언이다. 정부에서는 한국문학의 전통과 위상을 깊게 하고 한 단계 끌어올린 공을 인정해 문화훈장을 추서했고, 문학 3대 단체는 합동으로 문인장을 치러 명천을 기렸다. 그리고 유언대로 화장해 관촌 솔밭에 뿌렸다.

그의 2주기를 맞아, 문인과 사회 각계 인사 100여명이 '명천 이문구 기념사업회'를 발족했다. 발기문은 "명천은 이 나라 문학을 위해,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평생 몸 바치다 갔다"며 "그 고결한 문학과 올곧은 삶을 그대로 흘려보내서는 안 되고 오히려 이 부박한 이승의 동네를 지키는 왕소나무, 느티나무로 남게 하는 것이 그의 뜻을 받드는 일"이라 밝히고 있다.

명천의 유언이 전해진 직후부터 문단에서는 그의 문학과 삶은 공적인 것이므로 그 기념사업은 선후배들의 몫이라는 데 합의해갔다. 무엇보다 문인들의 뒷바라지와 기념사업에 몸 바쳤던 그가 자신의 이름으론 어느 것도 남기지 말라 했듯 그는 무욕으로 살아왔고 죽어 그렇게 신화(神化)했기에 더욱 기려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 이 부박한 이승 동네를 한번 둘러보자. 생전 자의로 고래등 같은 집을 짓고, 대리석이다 오석이다 하며 비싼 돌에 새겨진 문학비가 어디 한둘인가. 동료 문인들마저 외면해버려 눈길 쑥스러운 기념관이나 문학비가 어디 한둘일 것인가. 갈 날 아직 먼데도 미리 찜해 둬 풍광 좋은 곳에 들어설 기념물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삶과 혼의 올곧은 결정체인 문학, 때문에 선비과에 속하는 문학에도 이런 욕심의 문인들이 있을진대 아수라 잡판 세상에는 어떨 것인가. 지역 박물관이나 유물 앞길을 메우고 있는 낯간지러운 송덕비.공덕비들은 또 기하인가.

"마음을 기르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토정비결'로 널리 알려졌지만 실은 남명 조식 선생도 그의 학덕을 우러렀던 조선조 명유(名儒) 토정(土亭) 이지함(李之)의 '토정집'에 실린 말이다. 타계 직전 명천은 직계 할아버지인 토정의 이 문집을 한글로 좋게 윤문해 놓고 갔다.

바로 그 무욕에 대한 사회적 예우로 명천을 기념하자는 것이다. 이시우 보령시장은 "훌륭한 어른 명천 선생을 기려 우리 시대 영원한 선비로 살리기 위해 보령시가 앞장서 기념사업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대천해수욕장 뒤 관촌 솔밭과 생가, 청라 저수지가 그림같이 펼쳐진 집필실과 그 바로 옆 토정을 모신 화암서원 등을 연계해 문화체험의 장을 꾸며 명천의 문학은 물론 이 땅의 올곧은 선비 정신, 무욕의 마음을 가르치겠다는 것이다.

마지막 여름, 불면 날아갈 듯 수척해진 몸을 이끌고 설악산 백담사에 올라 그해 겨울 헐벗은 북한 동포들에게 보낼 내복을 큰스님으로부터 시주해 가던 명천 선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무욕의 화신으로 되살아날 선생께 오늘 2주기에 더운 술 한 잔 더 올린다.

이경철 '문예중앙'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