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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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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트러스트(Trust)'. 10년 전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의 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가 쓴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사회 구성원 사이에 형성된 신뢰가 경제적 번영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높은 신뢰는 사회적 자본이라고도 했다. 이 사회적 자본이 두터울수록 국가경쟁력이 강화된다고 봤다. 신뢰의 수준이 높을수록 갖가지 사회적 비용이 감소해 효율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후쿠야마는 이를 기업의 발전에 적용했다. 신뢰도가 높은 사회에선 소규모 가족기업이 근대적 대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신뢰관계가 가족이나 혈연의 테두리에 한정된다면 가족기업이 대기업으로 발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구성원 간에 신뢰도가 낮은 '저신뢰 사회'로 중국.프랑스.이탈리아, 그리고 한국을 꼽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중국인은 가족 내에서의 결속력은 매우 강하지만 대문을 나서면 다르다고 한다. 남을 잘 믿지 않는다. 그래서 가족경영과 세습경영이 화교 기업들의 특징이라고 했다.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은 중국보다 조금 나은 정도다. 유교적 충효사상도 가족 내의 규범에 맴돌 뿐 사회 전체적인 신뢰형성엔 별로 기여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불확실하며, 가부장적이고 가족주의적 경영이 여전하다고 했다. 이게 한국 경제성장의 한계라는 것이다. 10년 전의 진단이었다.

만일 후쿠야마가 지금 개정판을 낸다면 한국을 어떻게 평가할까. 한국 사회의 신뢰도가 초판 때보다 높아졌다고 할까.

불행히도 그렇지는 않을 듯하다. 더구나 요즘처럼 입시부정과 내신조작이 잇따라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선. 내 자식만 잘되면 된다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학부모, 이에 놀아나는 학교,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선 양심도 묻어버리는 학생,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을 쳐도 무기력하기만 한 규범과 제도….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감시감독을 엄격히 하고, 처벌을 강화하고, 대입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는다. 이게 모두 구성원 간에 룰과 규범에 대한 신뢰가 낮기 때문에 지출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이 아닐까. 그런 비용이 커진 탓에 우리 사회의 미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는 듯해 불안하다.

남윤호 패밀리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