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오해 부른 메시지 세계 환시장 요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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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오후 5시 한국은행은 국회 재경위원회와 한은 기자실에 업무현황 보고서를 전달했다. 의례적인 보고 자료였기 때문에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오후 9시 로이터 통신이 이 보고서를 보고 전 세계로 타전한 기사 한 줄이 외환시장을 급반전시켰다.

"2000억달러의 외환보유액을 가진 한국의 중앙은행이 통화를 다양화할 것이다." 외환보유액의 3분의 2 이상을 달러로 보유한 한은이 달러 팔자에 나설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마침 수출 호조와 외국인의 주식 매수 재개로 달러가 넘치던 서울 외환시장에선 22일 개장하자마자 달러 팔자 주문이 쇄도했다. 원-달러 환율은 이날 하루 새 17.2원이나 폭락했다.

'한은 쇼크'는 밤 사이 외신을 타고 뉴욕 외환시장까지 강타했다. 22일(이하 현지시간) 뉴욕시장에선 개장과 동시에 달러가 엔과 유로에 대해 일제히 약세를 보였다.

세계 4위 외환보유국인 한국의 중앙은행이 달러 팔자에 나설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시장을 짓눌렀다. 이날 달러 낙폭은 유로에 대해선 지난해 8월 6일 이후 6개월반 만에, 엔에 대해선 지난해 10월 8일 이후 4개월반 만에 최대치였다. 뉴욕시장의 충격은 다시 23일 아시아 시장으로 이어졌다. 이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개장 초 7년3개월 만에 처음으로 1000원선이 무너지면서 998.1원까지 밀리기도 했다.

개장과 동시에 한은이 "달러를 팔겠다고 한 게 아니다"고 해명에 나서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한은이 시장에 메시지를 잘못 보내는 바람에 '세자릿수 환율시대'를 재촉한 것이다.

속절없이 추락하던 환율은 오후 들어 청와대와 재정경제부.금융감독위원회.한은 등이 긴급 대책회의를 열 것이란 소식에 가까스로 진정되기 시작했다. 이날 원-달러 환율은 2.3원 떨어진 1003.8원으로 마감됐다.

◆ 한은 보고서의 진실은=한은이 국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문제가 된 구절은 '투자 대상 통화도 다변화'라는 단 네 단어. 이에 대해 이영균 한은 부총재보는 "달러 가치가 떨어지면서 세계 각국이 외환 보유 통화를 다변화하는 추세"라며 "외신들이 잘못 이해하고 과민 반응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시장 일각에선 재경부가 외환보유액 중 200억달러를 떼어내 한국투자공사(KIC)를 설립하려 하자 한은이 과잉 반응을 보인 데서 생긴 해프닝으로 풀이한다. KIC가 설립되면 투자수익률이 한은의 외환보유액 운용 수익률보다 높을 가능성이 크다. 이를 의식해 한은이 운용 수익률을 높일 방안을 찾다가 비정부채 투자 확대와 통화 다변화란 방안을 내놨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은이 원한다고 외환보유액의 통화 구성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외환보유액은 유사시 석유나 원자재.식량 등을 사오는 데 쓸 돈이다. 한국의 경우 외국과의 거래에서 달러화 결제 비중이 80%에 달한다. 따라서 외환보유액의 달러화 비중도 여기에 맞출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한은의 신중한 처신 필요=한은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 같은 지적이다. 한은의 일거수 일투족이 국내시장은 물론 국제시장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처신은 물론 발언 하나에도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은 보고서로 촉발된 원-달러 환율의 급락세가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미국이 전 세계적인 달러 약세를 계속 밀어붙이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정경민.김창규.이승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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