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로 끝난 '75조원 사기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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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시중은행 과장 신모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서 청와대에서 국책사업을 담당한다는 '신 회장'을 소개받았다. 신 회장은 비밀 사업을 논의하는 '안가(安家)'라며 그를 서울 한남동의 110평짜리 호화 빌라로 데리고 갔다. 내부는 온통 수입 가구로 채워져 있고, 벽은 신 회장이 전직 대통령과 찍은 사진과 미국 정부에서 받았다는 항공우주사업 허가서 등으로 장식됐다.

그곳에는 재정경제부 실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정모씨와 청와대 직원이라는 '배 회장'이 먼저 와 있었다. 이들은 '청와대 특별관리 계좌임을 증명함'이라고 써 있는 통장을 보여주며 "20억원을 줄 테니 비자금 47조원을 9900억원짜리 수표 47장으로 세탁해 차명계좌에 입금해 달라. 정부 비자금이니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장에 찍힌 청와대 마크를 본 신 과장은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좀 황당하다는 생각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 청와대 마크가 찍힌 가짜 통장(上)과 사기단이 재력가 행세를 위해 타고 다니던 링컨타운카. 최정동 기자

지난 7일 경찰에 적발된 이른바 '청와대 비자금 세탁팀' 사기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고 있다.

이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동대문경찰서는 사기단의 기획총책 '배 회장'(59)과 모집총책 '신 회장'(63)을 구속한 데 이어 사기단의 자금총책을 맡았던 정모(44)씨를 23일 체포했다.

경찰은 이들 3인방이 국정원 부장.정보사 보좌관.은행지점장을 사칭한 중간책을 모았으며, 사기단의 규모는 그 아래 연락책 등 37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사기단에는 농협지소장 박모(구속)씨 등 네 명의 금융기관 직원도 포함됐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경북의 한 농협 지소장 등을 공범으로 포섭해 66조원을 계좌이체하도록 하고, 시중은행 대리를 속여 6조9300억원어치의 수표를 발행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지난해 말 일어난 미 중앙정보국(CIA) 직원 사칭 사기 사건도 이들의 소행이었다. 이들은 전국 수협의 휴면계좌에 있는 자금 2조원을 '유엔 기금'으로 조성하기로 청와대와 약속했다고 전남 장흥의 한 수협 지소장을 속여 2조원짜리 수표를 발행받았다. 그러나 2조원짜리 수표를 소액 수표로 바꾸는 과정에서 들통이 났다. 총 75조원을 빼내려 했던 사기극이 실패한 것이다.

이들은 고급 외제차와 관용차처럼 보이는 검은색 차량을 타고다니며 은행원 등을 포섭했다. 정보사 중령 역을 맡은 중간책은 실제로 정보사 마크와 중령 계급장이 붙은 군복을 입고다니는 등 치밀한 각본에 의해 움직였다. '신 회장'은 사기 혐의로 지명수배된 상태였으며 재경부 관리를 사칭한 정씨도 사기전과 2범이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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