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포기 않겠다는 약속 지켰다” 지진·정쟁에 찢겼던 칠레 하나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13일(현지시간) 0시11분 첫 번째 구조자가 나오자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은 감격에 겨워하며 말했다. 칠레 전국은 축제 분위기가 됐다. 거리로 몰려나온 시민은 새벽까지 국기를 흔들고 칠레 응원가를 부르며 행진했다. 지나는 차량도 경적을 울리며 환호했다. TV로 구조작업을 지켜본 칠레 국민도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칠레 각 성당에선 광부의 무사 귀환을 염원하는 기도회가 밤새 열렸다.

33명의 기적 같은 생환이 8개월 전 지진으로 분열했던 칠레를 하나로 뭉치게 했다. 500여 명의 희생자와 200만 명의 이재민을 낸 지난 2월 27일 지진 이후 칠레인의 가슴엔 멍이 들었다. 지진 당시 거리엔 약탈자가 넘쳤다. 지진에 이어 해변 마을을 덮친 쓰나미조차 제때 경고하지 못한 정부엔 비난의 돌팔매가 날아들었다. 지난 1월 선거에서 우파 피녜라에게 정권을 빼앗긴 좌파도 정부를 겨냥했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구조 순간에도 서로 마지막 순서를 다툰 광부들의 모습은 칠레 국민을 감동시켰다. 칠레 성공회 알레한드로 카르메릭 신부는 “그들이 보여준 희망과 믿음이 칠레를 하나로 단결시켰다”고 말했다.

지진 이후 곤경에 처했던 피녜라 정부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도 올라갔다. 피녜라는 칠레 역사상 가장 돈 많은 대통령으로 꼽힐 정도로 부유층에 속한다. 이 때문에 서민층으로부터 거부감도 샀다. 그런데 이번 구조작업을 현장에서 진두 지휘하면서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산호세 광산의 ‘희망 캠프’도 칠레인의 단결에 새 성지가 됐다. 갱도 붕괴사고 이후 광부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가족과 구조대 등이 머물렀던 이곳은 전 세계인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