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한편 보고 가세나] 46. 피란시절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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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 1984년 찍은 영화 '비구니'에서 배우 김지미씨(마차 옆에 서 있는 사람)가 한국전쟁 때 피란하는 장면.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되찾은 유엔군과 국군은 북진(北進)을 계속했다. 각각 열일곱, 열다섯 살이었던 작은형과 나는 군인들을 뒤따라 대동강변에 다다랐다. 남한으로 치면 노량진 같은 곳이었다. 강만 건너면 평양 시내였다.

우리가 찾아가려는 작은이모 집은 대동강 너머에 있었다. 하지만 유엔군은 민간인의 도강(渡江)을 막았다. 할 수 없이 대동강 남쪽에 있던 큰이모 집에 머물렀다. 1주일이 넘도록 도강 금지령은 풀리지 않았다. 시내에 나가보니 탱크와 장갑차를 앞세우고 군인들이 남쪽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군대가 후퇴하는 것 아니냐며 술렁거렸다. 그러나 평양 계엄사령관 명의로 나붙은 공고문에는 '시민은 동요하지 말라. 국군은 후퇴하는 게 아니다'고 돼 있었다. 산악 지역의 공비를 유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낌새가 수상했다. 거리 곳곳에는 포탄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며칠 뒤 서부전선에 나가있던 큰형이 지프를 몰고 작은형과 나를 데리러 왔다. 사촌누나들도 타려고 했지만 자리가 모자랐다. 지프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황주쯤 내려왔을 때였다. 평양 쪽에서 '터엉, 터엉' 포탄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아마도 국군이 퇴각하면서 아까 보았던 길가의 포탄들을 터뜨린 것 같았다. 51년 1.4 후퇴였다. '작은이모네도 살아남지 못했겠구나'. 어릴 적 나를 무척 귀여워해 주던 기억이 떠올라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갈월동 집을 찾아가니 아무도 없었다. 수소문해보니 사흘 전에 온 가족이 부산으로 떠났다고 했다. 영등포역에서 부산행 기차를 탔다. 그야말로 발 한쪽 디딜 틈이 없었다. 기차 지붕에도 짐과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터널을 지날 때였다. "OO야, OO야-." 여자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엄마의 절규였다. 갓난아기를 안고 기차 지붕에 몸을 실었다가 깜빡 잠드는 바람에 손에서 아이를 놓친 것이다. 온갖 소음에 묻혀있다가 기차가 터널에 들어서자 객실까지 들려온 것이었다. 그 소리가 얼마나 처절하던지. 그렇게 아이를 잃은 부모가 적지 않다고 했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기차 지붕에서도 졸음을 참지 못할 만큼 모두 지치고 굶주린 채 피란길에 나섰던 것이다.

부산에 도착했지만 어디서 아버지를 찾아야할지 막막했다. 마침 매부의 형이 검찰청 고위간부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무작정 검찰청을 찾아갔다. 다행히 서로 연락이 닿았던지 토성동에 있는 집의 주소를 알 수 있었다. 아버지와 큰어머니, 이복형제들은 아버지 친구 소유의 한 여관 방에서 묵고 있었다. 적산(敵産)가옥을 개조한 여관이었다. 아버지는 급하게 피란하느라 거의 빈손으로 내려온 것 같았다. 우리를 보자마자 아버지는 격노했다. "이리 오라우. 이놈의 새끼들. 연락도 없이 어디를 다닌거이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간"이라며 작은형의 뺨을 후려쳤다. 아버지가 그토록 화를 내는 건 처음 보았다.

그러나 다다미 열두 장을 깐 방에서 10여명이 생활하는 건 너무 불편했다. 더구나 친어머니도 아닌 '큰어머니' 눈치를 보자니 더 머물 수가 없었다. 작은형은 당시 적십자사에서 근무하던 5촌 당숙인 이범석씨의 소개로 미군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다. 작은형마저 떠나자 더 이상 정을 붙이기 힘들었던 나는 집을 나와 부산 부둣가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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