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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게으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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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네 가지가 있다고 한다. 쏘아버린 화살과 내뱉은 말, 지나간 시간, 그리고 게으름의 결과다.

화살은 움직임이다.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무한한 이동이다. 특정 지점에 화살이 도착했나 싶으면 어느새 다른 자리로 옮겨 간다. 그래서 최초의 위치로 되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화살엔 또 방향성이 있다.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는 한 계속 그쪽으로 날아간다.

이런 방향성과 움직임이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의 속성이다. 입에서 떠난 말도 쏜 살과 다르지 않다. 그 말은 누군가의 가슴에 화살처럼 꽂힌다. 취소나 사과가 있어도 없던 것으로 되진 않는다. 진의가 잘못 전달됐어도 흔적은 남는다. 기억으로 남고 무의식으로 남고 연상으로 남는다. 이건 말의 가장 기초적인 특성이다.

국가의 말은 개인의 말보다 돌이키기가 어렵다. 북한 외무성이 핵무기를 만들었다고 발표했는데도 이를 '벼랑 끝 전술' '몸값 올리기 협상용' 정도로만 보는 시각이 많은 것은 유감이다. 말의 엄중함보다 말의 게임적 성격을 크게 보는 시각이다. 여기엔 상대방이 겁먹고 몸값을 더 쳐주면 북한이 벼랑 끝에서 안전지대로 되돌아 올 것이란 가정이 깔려 있다. 그런데 이 가정은 현실에서 증명되지 않았다.

북핵 위기가 10년 이상 지루하게 진행되다 보니 사람들이 어느새 머릿속 가정과 입 떠난 말을 혼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정은 가정일 뿐이다. 가정보다 엄중한 건 말이다. 말은 그 자체로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다.

북한이 참말을 했다면 한국은 최소한 히로시마(廣島)에 떨어졌던 원자폭탄 수준의 핵공격 가능성에 노출돼 있다. 그들의 핵능력의 범위는 아직 미국이 아니고 한국이다. 따라서 말이나 심리, 또는 물리적으로 이를 막아낼 조치를 취해야 한다.

북한이 거짓말을 했다면 그들은 말의 돌이킬 수 없는 속성을 과소평가한 셈이다.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외무성의 말은 한국인 대부분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기 때문이다. 훗날 생존을 위해 불가피했다고 변명하더라도 북한 당국과 지도자는 용서받기 어렵다. 돌이킬 수 없는 것 중엔 게으름의 결과도 있다. 북한의 말에 한국이 게으름을 피우면 그 결과 역시 참담할 수 있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