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법치주의 근간 흔들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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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최근 몇몇 여당 의원이 국회 대정부 질문 기회를 이용해 헌법재판소와 법원을 원색적으로 힐난하는 원고를 배포하거나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헌재는 '군사정부 시절 생긴 기형적 기관, 3권분립의 기초를 흔드는 기관'이므로 폐지되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또 법원은 '편파적 판단이나 자의적 해석을 하는 기관, 선거사범 재판 때 여당에 불리한 역차별을 하는 기관'이라고 매도했다고 한다.

*** 우려되는 헌재 폐지 발언

국민을 대표한 입법기관이고, 그것도 여당 의원들이 이런 견해를 표출했다고 하니 매우 걱정스럽다. 여당 의원 다수 의견이 아니길 희망한다. 현 여당은 지난 국회의 대통령 탄핵소추의결 때 "의회에 의한 쿠데타"라고 당시 다수당을 맹공했다. 그러다가 의회의 탄핵소추 기각결정이 내려지자 헌재에 대한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신행정수도건설법에 대해 헌재가 위헌결정을 할 때에는 다시 헌재가 '사법에 의한 쿠데타'를 했다고 무차별 공격했다. 이 흐름을 보면 여당 측은 헌재를 자신의 이해와 이익에 도움이 되느냐 여부를 기준삼아 헌재의 존폐까지 거론하는 극히 이기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17대 국회의원 가운데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된 여당 의원이 야당 의원보다 월등 많은 비율이어서 의원직 상실에 해당하는 선고형을 받은 의원도 여당 쪽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법원이 선거사범 재판에서 여당 의원을 역차별한다고 눈을 부릅뜨고 정치공세를 편다면 사건의 담당판사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위협일 수도 있다. 이러한 작태는 사법권 독립에 대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침해라 해도 변명키 어려울 것 같다.

여권 일각의 이러한 언동을 미루어 볼 때 그들은 내심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해주기를 기대하지는 않는지 의구심마저 들 정도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은 극에 달하고 있다. 통합기능보다 분열기능이 사회를 압도하는 양상이다. 분열과 갈등은 바로 분쟁으로 직결된다. 분쟁이 순조롭고 평온하게 해결되는 사회가 선진 국가다. 우리는 헌법을 만들 때 이 분쟁을 법에 의해서 교통정리하고 해결하도록 약속했다. 이것이 우리 헌법의 정신이고, 바로 자유민주 법치질서가 대한민국의 기초다. 갈등과 분열이 확대 재생산되는 참여정부 아래에서 그래도 대한민국이 장기적 전망에서 전향적.발전적으로 굴러가는 데에는 헌재와 대법원 등 사법부가 그 역할을 제대로 이행한 공로에 힘입은 바가 크다. 사법부마저 시류에 편승했다면 한국호의 좌초라는 불행한 시나리오가 전개될 위험성을 배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헌재를 비롯한 사법부의 구성원은 사법권의 독립이 결코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켜야 하며 결정적 계기에는 희생까지 감내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사법부로 우뚝 서고 국민은 이제야 믿을 수 있는 사법부를 가졌다고 자랑할 것이다.

*** 불리하다고 매도해선 안 돼

개개의 판결.결정에 대한 논평이나 평가는 자유롭고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사법의 엄정성.공정성 확보를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재판관의 바람직하지 않은 법정지휘나 재판업무 수행 자세도 비판받고 개혁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 사법부 결정이 자신의 세력에게 불리하다 하여 그 기관 자체를 매도하는 것은 법치질서의 근간을 흔드는 큰 과오를 범하는 일이므로 마땅히 삼가야 한다. 국회가 일시 정쟁에 매몰돼 있다 하여 국회를 폐지하자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법치주의를 흔드는 정치적 공세를 그만두고 법정에서 당당하게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며 겸허하게 결정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자세가 바로 선진 한국의 초석이 될 것이다.

이경재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