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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속도 줄이고 걸으니 숲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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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아마도 ‘산책’이라는 매력적인 단어의 호출이 아니었다면 어느 9월의 이틀에도 내 구두는 착실한 양떼처럼 일상의 황무지를 맴돌았을 것이다. 피노키오의 수탉 같은 머리칼을 하고 노트북에 매여, 사람이 되기 위한 거짓들을 궁리하느라 코가 빠졌을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바쁘게 자신의 길 위를 달려간다. 산책도 사색도 숨 쉴 여유도 없이.

북한산을 감싸 안은 둘레길, 산의 품에 안긴 듯 둘러가듯 걷다 보면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된다. 북한산 둘레길 흰구름길 구간의 구름전망대에 오르면 북한산 만경대와 인수봉, 도봉산 오봉과 선인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동연 기자]

그러다 문득, 어느 경이로운 오솔길을 춤추듯 걸어가는 파격적인 하루를 꿈꾸지 않을까. 삶이 그런 꿈조차 빼앗아 갔을 때, 우리의 현실은 얼마나 남루해지는 것일까. 등산까지는 버겁고 바지락이던 일상이 지겨워질 때 둘레길로 가 보자. 속도를 죽이고 숲이 전하는 말을 엿들어 보자. 북한산 둘레길은 북한산과 도봉산의 산자락을 휘감아 도는 총 70㎞의 길이지만 아직은 북한산 자락길 44㎞만 만들어져 있다. 거리감각이 도통 없는 나였으니 44㎞쯤이야 일단 덤벼보기로 했다. 둘레둘레 길을 따라가면 되지 억지로 정상을 정복해야 할 이유는 없다.

첫날, 흰구름길~우이령길 구간
태풍 곤파스가 스치고 가는 터라 간간이 빗방울을 예상해야 하는 9월 9일 오전 9시. 가벼운 트레킹 복장으로 네 사람의 일행과 둘레길 입구에 도착했다. 이틀의 일정 중 첫날에는 정릉 솔샘길 끝막에서 출발해 흰구름길과 순례길, 소나무숲길과 우이령까지 걸어보기로 한다.

흰구름길 시작점인 북한산 생태숲 입구에서부터 풀냄새가 느껴진다. 허름한 도시의 먼지를 걸치고 살아가는 도시민들에게 이토록 가깝고 아름다운 산책로가 있을까. 둘레길 초입부터 계단과 목책길이 타래처럼 이어진다. 길은 다습한 풍광으로 서로 겹치고 연결돼 있다. 능선이 많고 평지가 적은 한국 땅에선 익숙한 풍경이다. 길목마다 보랏빛 벌개미취 등 야생국화들이 난만하게 저들만의 질서와 영역을 이룬다. 자연의 풍광을 이용했지만 그 경관을 크게 변형시키진 않은 길목마다 표지판과 말뚝, 현재 위치를 빨간 화살표로 알려주는 지도까지 있어 초행자라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다. 목책과 계단은 사람이 만들었지만 완연히 자연풍광과 조화된 듯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있다. 간간 네모난 둘레길 표지판이 찍찍이로 나무에 매달려 있다. 못질로 나무를 상처 입히지 않고, 나무의 성장의 부피까지 존중하려는 배려가 엿보인다. 무분별한 샛길이 자연을 훼손할까 싶어 길을 막아놓은 철망들도, 둘레길 바깥으로 터놓은 등산로도 보인다. 둘레길이 이미 무수한 발걸음이 만들어놓은 길을 이은 것이었다니 사계절 북한산을 오르내렸을 인파를 짐작하게 한다.

둘레길에서 보면 북한산 산세는 적당히 높고 낮아 친숙하게 여겨진다. 자연이 인간을 위압하지 않고 인간이 자연을 억누르지 않는다. 가파른 경사에서 쏟아지는 폭포와 절묘한 바위산보다는, 사람이 발을 담가도 좋을 시원한 계곡길이 오밀조밀 굽이친다. 희귀한 새와 수목보다는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다람쥐와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둘레길은 사람의 삶을 자연 속으로 끌어들이는 길이다. 꼭 억지로 끝까지 가야 하는 길이 아닌, 구간을 선택해 자유롭게 즐기며 걸어가는 길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인다고 했던가. 동행한 숲 해설가가 수풀 사이에서 다리가 유난히 긴 장님거미를 발견했다. 거미는 뭐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카메라 앞의 모델이 된다. 그는 큼지막한 나무를 한 번 만져보라고도 한다. 아! 세상에. 방패모양의 나무껍질이 코르크처럼 폭신폭신하다. 북한산에 산다는 멧돼지 이야기로 웃음을 뿌리며 걷다 보니 빨래골이다. 수량도 넉넉하고 물도 퍽 깨끗하다. 60~70년대까지만 해도 빨래터로 이용되던 이곳에서 궁녀들이 남에게 보여주기 힘든 속곳 같은 것을 빨았다고 한다.

허혜정 교수(시인평론가) 한국사이버대 방송문예창작학과 octopusin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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