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래 “두 경기 치러보니 허 감독 심정 알겠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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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직 축구 국가대표팀 사령탑인 허정무(왼쪽)·조광래 감독이 지난 14일 대담을 마친 뒤 중앙일보사 인근 공원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민규 기자]

축구 국가대표팀 전·현직 사령탑인 허정무·조광래 감독이 중앙일보 창간 45주년을 맞아 자리를 함께했다. 지난 14일 서울 서소문 중앙일보 본사 회의실에서 한 대담에서 두 사람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한국이 8강 이상에 오를 수 있도록 전체 축구인이 힘과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연세대 74학번 동기인 두 사람은 1970~80년대 한국 축구의 부흥기를 이끌었고,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뒤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이어 지도자로 변신해 90년대 말~2000년대 중반 프로축구 K-리그에서 적장으로 만났다. 10년 가깝던 외국인 대표팀 사령탑 시대에 마침표를 찍은 허 감독은 남아공 월드컵에서 한국을 사상 첫 원정 16강에 올려놓았다. 조 감독은 허 감독의 뒤를 이어 ‘독이 든 성배’로 비유되는 한국 대표팀을 맡았다. 두 사람은 선수 시절의 추억으로 대담을 시작했고, 감독인 현재의 책임과 각오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두 사람의 첫 인연은 대학 입학 때인가.

(조광래)“허 감독과는 고교 시절 얼굴을 알게 됐고 연세대 입학 동기가 됐다. 좋은 선수와 함께 운동하게 돼 기뻤다. 좋은 선수가 많다 보니 대표선수도 많이 나왔다.”

(허정무)“조 감독은 나보다 모든 면에서 나았다. 축구도 잘하고. 패스나 기교도 좋았고. 우리 동기 중 좋은 선수가 많았지만 좋은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그러다 보니 감독님도 많이 바뀌었다.”

-나란히 대표선수를 하면서 한국 축구의 부흥기를 이끌었는데.

(허)“대표팀에는 내가 좀 빨리 들어갔다. 74년이다. 이회택 선배가 부상으로 빠진 자리에 대타로 들어갔다. 킹스컵 대회에 태국과의 결승전에서 데뷔골을 터뜨렸다. 귀국길에 홍콩 4개국 대회에 출전했는데 주전으로 뛰어 우승했다. 그러면서 세대교체 얘기가 나왔다. 75년 ‘화랑팀’(국가대표 1진)이 만들어지면서 선수가 대폭 바뀌었다.”

-그 세대교체 멤버가 78년 3개 대회(아시안게임·대통령배·메르데카컵)를 휩쓸었다.

(허)“멤버가 쟁쟁했다. 전방에 김재한·오석재, 양쪽 윙에 차범근과 저, 후방에 김진국·이강조·조광래·김호곤·박성화·최종덕·조영증·황재만까지.”

(조)“포지션별로 선수들의 개성이 강했다. 조화가 잘돼 좋은 게임도 했고. 기술 좋은 선수만 있다고 우승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조화를 이루며 특징 있는 선수들이 적재적소에 배치돼야 하는데, 그때가 멤버 조합이 가장 잘됐을 때가 아닌가 싶다.”

-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우승한 뒤 나란히 대표팀을 은퇴했는데.

(허)“공식 은퇴경기는 아니었다. 사우디와 결승전에서 조 감독과 변병주가 골을 넣어 2-0으로 이겼다. 사실 나는 그 대회에서 역적이 될 뻔했다. 이란과 준준결승전 때 퇴장당했다(한국은 승부차기에서 이란을 꺾었음).”

(조)“10명이 뛰었던 거 기억난다.”

(허)“그래서 준결승전은 못 뛰고 결승전만 뛰었다. 2~3년 더 뛰고 싶었는데 팀(울산)에서 별로 원하지 않아 은퇴했다.”

(조)“나는 태릉에서 합숙할 때부터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은퇴하고 지도자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못 먹던 뱀탕까지 먹었다. 준결승전과 결승전에서 골도 넣고 결과도 좋았다.”

-그간 외국인이 맡던 대표팀 사령탑을 국내 감독으로는 허 감독이 먼저 맡았다.

(허)“(내가 감독이었던) 2000년 시드니올림픽과 관련해 한이 많다. 2승1패로 조별예선에서 떨어졌다. 과연 실패일까. 탈락했으니까 비난을 감수했다.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그때의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주위의 조언을 많이 들었다. 대표팀은 조 감독이 앞으로 더 발전시킬 것이다.”

(조)“허 감독이 부담스러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국내 감독이 맡아 잘못된다면 (대표팀 감독직을 희망하는) 동료들에게 미안한 상황이 되기 때문에. 우리도 잘될 거라고 말하면서 승리를 기원했다. 허 감독이 준비를 많이 했다. 2000년의 실패가 채찍이 됐을 것이다. 한국축구가 한 단계 더 올라서는 발판을 만들어줬다.”

-조 감독은 최근 대표팀 2경기에서 천당과 지옥을 왔다갔다 했다.

(조)“허 감독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판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승부의 세계에서 승과 패는 전혀 다른 결과니까 이해한다. 하지만 지금 대표팀은 내가 원하는 게임을 하기 위해 선수를 확인하는 과정이다. ‘패스 횟수를 더 많이 하자’ ‘패스로 체력 부분을 커버하자’ ‘개인능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수비는 조직력으로 보완하자’고 얘기해왔는데 이는 패스게임으로 가기 위해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대비하려면 그렇게 가야 한다. 아직 두 경기밖에 안 했다. 훈련시간은 4~5일에 불과했다. 좀 더 지켜봐 달라.”

(허)“그래도 조 감독은 자기 색깔이 있다. 나보다 좋은 감독이다.”

(조)“따끔하게 얘기해 달라.”

(허)“바둑 둘 때 옆에서 어설프게 훈수를 두면 패착하게 된다. 서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조 감독은 잘하고 있다. 그런데도 옆에서 어설프게 훈수하는 건 나쁘다. 급할 필요가 없다.”

-두 감독 모두 세대교체를 강조했다. 원칙이 뭔가.

(조)“허 감독이 세대교체를 많이 했다. 그 선수들이 현 대표팀의 주축이지만 그들이 어디까지, 또 얼마나 더 해줄 수 있을까도 생각해야 한다. 지동원(전남), 석현준(아약스) 등 어린 선수를 테스트하는 이유다. 어린 선수들에게 희망을 줘야 그들이 더 노력한다. 대표팀에서 뽑으면 소속팀에서도 기대를 갖고 키워줄 것으로 생각한다.”

(허)“세대교체는 하는 듯 안 하는 듯,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해야 한다. 베테랑의 경험은 소중하다. 남아공 월드컵 때 박지성(맨유)과 이영표(알힐랄)를 불러놓고 한 얘기가 있다. ‘너희는 세계적인 팀에서 뛰면서 월드컵에 여러 번 나선 소중한 경험이 있다. 너희들은 후배들의 경기력과 기술을 업그레이드해 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조화와 경험이 답이다.”

-감독을 하면서 외롭다고 느낄 때가 많을텐데.

(조)“그런 생각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평소 좋은 친구 만나면 술 한잔 하지만 기분이 나쁠 때는 술을 안 마신다. 혼자 골프연습장 가면 스트레스가 좀 풀린다. 공을 치면서 잘못된 부분을 돌이켜본다. 혼자 시간을 갖는 편이다.”

(허)“예전에는 술로 스트레스를 풀었지만 요즘은 바뀌었다. 답답한 일이 생기면 상대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왜 이런 일이 생겼나 생각한다. 생각하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훌훌 털어낸다.”

-전임 감독으로서 조 감독에게 희망의 덕담을 건넨다면.

(허)“예선 과정에서 여러 고비가 있겠지만 착실히 준비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다. 브라질에서는 남아공 때 이상으로 8강, 4강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꼭 한번 해주길 바란다. 4년이 긴 것 같아도 금방 간다. 전체 축구인이, 온 국민이 하나가 돼 성원해 줬으면 한다.”

(조)“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아낌없는 지도와 편달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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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최원창·이정찬 기자
사진=김민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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