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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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권혁웅(1967~ ), '파문' 전문

오래 전 사람의 소식이 궁금하다면

어느 좁은 집 처마 아래서 비를 그어보라,

파문 부재와 부재 사이에서

당신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를 바라보라

당신이 걸어온 동그란 행복 안에서

당신은 늘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 젖었을 것인데

그 사람은 당신과 늘 반대편 세상이 젖었을 것인데

이제 빗살이 당신과 그 사람 사이에

어떤 간격을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하다면

어느 집 처마 아래 서보라

동그라미와 동그라미 사이에 촘촘히 꽂히는

저 부재에 주파수를 맞춰 보라

그러면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처럼 잡음이 많은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파문



비가 내리면 빗방울의 낙하 지점부터 동그랗게 퍼져나가는 물의 일렁임, 파문이 생긴다. 사람의 만남에도 만난 지점부터 마음이 일렁이면서 넓게 퍼지는 파문이 있다. 시인은 오래 전에 일렁임을 멈춘 그리움을 되살리는 방법을 제안한다. 처마 밑에서 비를 그어 파문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 그 파문의 동그라미를 따라 마음에서 잠든 그리움을 깨워 일렁이게 하는 것. 그리운 이의 목소리 들리도록 간절하게.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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