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cover story] '고속도로 국민가수' 김란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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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제 노래 한번 안 들어본 분도 드물걸요."

김란영(46)씨. 다른 가수들의 히트송을 부르는 리메이크 가수의 특성상 얼굴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속도로 위에서, 택시 안에서 누구나 한번쯤은 따라 흥얼거렸을 친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1988년 70년대 히트곡들을 모은 '슬로 메들리' 앨범을 내며 리메이크 가수 활동을 시작, 지난해까지 50여장의 음반을 냈다. 그녀는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얼추 수천만장은 팔려 나갔을 것"이라고 자랑한다. '길 가요' 판매상들이 "김란영 덕에 먹고 산다"고 입을 모을 정도다.

1973년 여수 MBC신인가요제에서 1위로 입상하면서 데뷔했다. 통기타 가수로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던 중 친분이 있는 작곡가의 부탁으로 우연히 히트곡 메들리를 부르게 됐다. 음반이 나온 줄도 모르고 있던 그에게 기획사에서 "대박이 났으니 어서 다른 메들리 앨범을 만들자"고 연락해 온 것이 오늘날의 '메들리 여왕'으로 이어졌다. 그동안 나훈아.설운도의 트로트에서 박강성.김종환의 성인가요, 왁스 같은 신세대 가수의 히트곡까지 자신의 감성으로 재탄생시켰다. 질리지 않고 부담없이 귀에 들어와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이 팬들의 평이다.

"음반이 잘 나간다, 내 노래 안 나오는 고속버스가 없다는 이야기들이 들려왔지만 마음은 그리 편치 않았어요. 저라고 공중파 TV의 가요 순위에도 오르고 얼굴도 알려진 '메이저 가수'가 되고 싶지 않았겠어요. '남의 노래만 부르느냐'는 말에 속이 상해 남몰래 눈물도 흘렸죠."

조금씩 여유가 생긴 것은 5년 전부터. 연륜이 쌓이면서 인기와 유명세의 덧없음을 알게 됐단다. 열광적이지는 않지만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해주는 동년배의 고정 팬들과 정도 쌓였다. "덕분에 운전할 맛이 난다"며 고속버스 운전사가 건넨 음료수를 받아들며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감사할 일"이란 생각이 들었단다.

마음을 느긋하게 가진 덕분일까. 2002년에는 리메이크가 아닌 자신의 곡을 담은 앨범을 발표했다. '살랑살랑' '가인' 등의 노래가 히트하면서 "내 노래로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지난해 12월에는 대구에서 30년 가수 인생에서 처음으로 작은 콘서트도 열었다. 비록 소규모였고 관객도 많지는 않았지만 나만의 무대를 가졌다는 사실이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 없었단다.

"언젠가 큰 무대에서 제대로 된 콘서트를 여는 것이 꿈이에요. 그동안 제 노래를 아껴주신 운전기사분들을 위해 고속도로에서 공연할 수 있다면 재미있겠죠?"

글=신은진 기자<nadie@joongang.co.kr>
사진=권혁재 전문기자사진=권혁재 전문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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