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 연수과정에 들어간 ‘화내지 않는 법’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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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호 31면

10만원 자기앞수표 도난·분실로 벌어지는 송사가 있다. 수표 간수를 허술히 한 바람에, 무심코 수표를 받으면서 본인확인을 소홀히 한 바람에 생긴 법률문제다. 정작 책임은 수표를 훔쳤거나 주워 쓴 사람에게 있지만 그는 온데간데없다. 잃어버린 자와 현재 가지고 있는 자. 서로 다소 간의 허물은 있지만 애꿎기는 매한가지다. 판사는 이때 길게 재판을 하지 않도록 적정한 선에서 몇 만원을 주고받으라고 합의를 주선해 주기도 한다. 사회생활 과정에서 살아 있는 법 공부에 수업료를 낸 셈 치고 각자 양보를 하자는 취지다.

꽤 오래전 배석판사 시절. 재판장은 재판에 열정적으로 몸을 던지던 분이었다. 재판 자체는 판사 일이지만 본질은 여전히 남의 송사다. 하지만 그분은 매사 자기 일로 여기고 소홀함이 없으셨다. 가히 후배 판사들에게 귀감이 될 만했다. 하루는 10만원 수표 사건이 우리 법정에서도 열렸다. 서로 간에 절충을 권고한 지 20분. 하지만 사람들은 완강했다. 돈 몇 만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피고가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판사님 자기 일이라면 그러시겠어요?” 오로지 그들의 최대 행복만을 생각하고 사건에 몰두하던 재판장은 그의 야속한 몰이해에 울컥하셨나 보다. 갑자기 법복을 추슬러 뒷주머니 지갑에서 1만원권 몇 장을 꺼내더니 ‘내 돈 대신 드릴 테니 그만 끝내고 가라’고 일갈하셨다. 놀란 것은 피고. “아이고 판사님, 왜 이러십니까.” 얼마나 답답하면 판사가 자기 주머니돈을 꺼냈을까. 기세에 눌린 피고가 승복했다. 다만 이 부분만큼은 늘 따라 하기 어려울 것 같다. 법정에서 든 부아 때문에 용돈을 털었다간 나중 후회가 크리라.

이어 진행된 사건은 원고가 꽤나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담당 판사에 대한 진정·투서를 일삼기로 유명했다. 재판장의 화를 돋우는 데 명수였다. 이 사건에 조심하자는 뜻으로 재판장은 주심판사인 필자를 돌아보며 엷은 미소를 보내셨고 필자 역시 미소로 화답했다. 그는 재판 내내 온갖 안다리, 바깥다리 시비를 걸어왔으나 재판장은 이에 휘말리지 않고 원만하게 재판을 마쳤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느새 간파했는지 판사들이 법정에서 자신을 비웃는 웃음을 웃었다는 이유로 또 진정을 한 것이다.

법정에서 판사 언행이 도마에 올랐다. 진정·투서를 낳은 사례들의 경위를 따져봤다. 원래 판사 말투가 그 모양인 경우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법정에서 판사들이 감정 조절에 실패한 탓이었다. 법정이란 곳은 원래 매우 강력한 스트레스 발전소다. 법정에서 고조된 공격 성향, 노르아드레날린의 수위를 낮추어주는 일은 판사의 책무다. 하지만 간혹 역할의 정체성 혼란이 일어나곤 한다. 재판 과정에서 자칫 사건에 깊숙이 휘말리다 보면 본분을 망각하고 사건 당사자가 되어버리는 험한 일이 벌어진다. 축구심판이 졸렬한 플레이를 지켜보다 못해 선수 대신 공을 골에 차 넣어주는 형국과 매한가지다. 늘 이런 경우 패자의 참담함은 판사의 몫이 된다.

그래서 이런 돌발사태에 대비한 체험학습 교육이 사법연수원 법관 연수 과정에 마련됐다. 화를 내지 않고, 잘 참기 위해서는 화를 나게 만드는 선수들의 수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상대방에 대한 예리한 관찰을 통해 그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것, 그가 이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로 자부하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것. 바로 직접적으로 그의 소중한 가치, 존재 자체를 하찮은 것으로 업신여기고 짓밟아 줄 것. 또는 그의 위선과 비일관성, 나태함과 무능을 비웃어줄 것. 이때 뻔뻔한 거짓말도 섞고 과장과 날조·왜곡을 총동원할 것. 널리 퍼진 악평 때문에 특히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 크게 실망하고 있는데 ‘정말 몰랐죠?’ 하면서 친절히 속삭여줄 것. 가급적 그런 비난을 공개된 자리에서 해 줄 것. 이 대목 무렵 상대방이 슬슬 화를 낼 요량인 듯하면 ‘너 왜 반말하세요?’ 하고 말꼬리를 잡아 싸움의 본질을 흐려준다. 또는 ‘별 일 아닌데 왜 화를 내느냐, 욱하는 성격 고쳐야 하겠다’고 마무리 멘트를 날려 그의 인격 불량을 한 번 더 꼬집어줄 것.

모의법정 돌발사태 연습장은 유쾌한 한바탕 웃음바다였다. 속 뻔한 약 올리기에 알고 넘어갈 판사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음 챙김이 입신의 경지에 오른 노(老)판사께 법정에서 화를 내시지 않는 비결을 여쭤 봤다. 돌아온 대답은 다시 질문이었다. 근데 정답이다. “법정인데 왜 화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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