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정조의 교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정조(正祖)는 조선 국왕 중 가장 수재였다는 평을 듣는다. 국왕이면서 스승인 군사(君師)를 자처할 정도로 당대의 석학이었다. 어릴 적부터 책을 너무 가까이 한 탓에 시력이 약해져 조선 국왕 최초로 안경을 쓴 임금이다. 정조는 세종.세조.성종.영조에 이어 대왕(大王)이라는 칭호를 들은 국왕이다. 영.정조 재위 기간은 농업과 상업의 발달로 국력이 신장하던 시기였다.

정조 집권 초기의 여건은 매우 나빴다. 무엇보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숨지게 하고,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던 노론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때였다. 노론은 '과거사' 문제가 언제 불거질까 전전긍긍했다. 정조는 그러나 재위 13년에야 사도세자의 산소를 옮겼고, 그러고도 8년이 지난 뒤 사도세자의 죽음이 억울했음을 공인하는 절차를 밟았다.

극심한 당쟁도 정조에게 큰 부담이었다. 영조(英祖)의 탕평책에도 조선 사회는 여전히 당파로 찢겨 있었다. 정조는 당파별로 자리만 안배했던 영조의 정책을 '혼돈의 탕평'으로 규정하고, 각 당파의 정치적 주장을 따져 더 나은 쪽을 택하는 '의리의 탕평'으로 이를 극복했다. 인사에서도 국왕을 중심으로 지지파와 반대파를 함께 기용하고 두 세력을 조절해 균형을 찾는 제3의 세력도 쓰는 방식을 택했다. 또 백성과 직접 만나 재위 24년간 4427건의 민원을 현장에서 접수, 처리할 정도로 민정을 보살폈다.

그러나 정조는 조선이 망하는 단초(端初)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조가 죽으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말년에 사돈인 김조순에게 외척의 정치개입을 권고해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길을 열어줬다. 실학사상을 수용해 개혁에 활용하지 못한 것도 정조의 한계로 꼽힌다. 정조 재위 기간인 18세기 후반은 세계가 재편되는 시기였다. 하지만 조선은 정조 이후 세도정치의 발호로 이렇다할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쇠락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지난해 말 노무현 대통령에게 '진짜 개혁을 하려면 정조를 통해 개혁을 배우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엊그제 밝혔다. 참여정부가 개혁을 기치로 내걸면서 정조 같은 역사적 사례(실패까지 포함)를 모르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 관계 저서까지 사서 노 대통령에게 보냈다고 덧붙였다. 유 청장이 강조하고 싶었던 정조의 교훈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세정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