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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유럽 관계 회복할 기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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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근 발표된 영국 BBC방송의 여론조사는 미국과 그 동맹국들 간에 존재하는 괴리가 얼마나 큰 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지난 4년간 세계가 더 위험해졌으며 미국은 이러한 불행한 사태에 대해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비단 프랑스뿐만이 아니다. 집권 2기를 맞는 워싱턴의 조지 W 부시 행정부에서도 지난 4년간 미국이 지나치게 스스로 고립돼온 것이 아니냐는 인식이 제기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인식이 유럽과 미국의 관계를 새롭게 개선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실제로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두 대륙의 감정적인 거리감이 그 어느 때보다 크다. 그러나 일련의 새롭고 눈부신 사태 전개가 이러한 사정에 변화를 가져왔다.

지진해일(쓰나미)에서부터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에서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와중에 싹트기 시작한 러시아와의 '차가운 평화'에 이르기까지,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의 사망에서부터 이라크 전후의 참혹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들은 미국과 유럽이 외교 부문이나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서로 같은 편이 아니라는 생각을 더 깊게 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이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함께 행동한다면 앞으로 잘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보여주었다.

남아시아의 쓰나미 재앙을 겪으면서 미국인과 유럽인들은 경쟁적으로 구호지원 활동에 나섰다. 미국은 큰 피해를 본 인도네시아의 반다아체에 최초로 군용 구조지원 헬리콥터를 보냈다. 유럽은 민간 차원의 인도주의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쓰나미가 '우리는 같은 지구시민'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러시아와 서방국가들의 관계에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것은 냉전으로의 회귀가 아니다. 양자 간의 '차가운 평화'는 러시아의 최근의 굴욕과 과거의 자부심, 그리고 소비에트연방 시절의 잘못된 통치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라크 전쟁으로 불거진 미국과 유럽의 불화를 종식시키고 실패한 전쟁의 비용을 줄이기 위한 결정적인 실마리를 이스라엘에서 찾을 수 있을까. 미국은 유럽의 도움을 얻어 중동평화의 핵심이 되고 있는 이 지역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아라파트의 사망으로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과 유럽이 마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과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와 진지하게 논의한다면 중동평화의 실현은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유럽과 미국은 압바스 수반을 측면지원해 주고 샤론 총리가 이스라엘의 극단주의자들과 싸울 수 있도록 힘을 합쳐야 한다. 워싱턴과 이스라엘, 유럽과 팔레스타인이 서로 한 팀이 돼 중동평화를 위해 손발을 맞출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압바스는 팔레스타인 근본주의자들에게 아라파트와 달리 자신은 평화에 대한 의지도 있고 무장세력에 반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샤론 총리도 유대인 정착민을 철수시킴으로써 폭력이 아닌 협상으로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입증해야 한다.

유럽과 미국 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러시아나 중동문제 해결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재선에 성공한 부시 대통령은 국내외적으로 더욱 합법성을 과시할 수 있게 됐다. 유럽인, 특히 프랑스인들은 (부시 재선이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을 한 미국이 이상한 나라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미국은 대서양 사이의 긴장을 완전히 해소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라크 위기로 더욱 악화된 부정적인 감정은 다소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두 대륙의 신뢰와 협력을 위한 여건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존 케리 민주당 후보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하더라도 이루지 못할 일을 부시 2기 행정부가 성취할 수는 없다.

정리=한경환 기자

도미니크 모이시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