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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과 거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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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거절은 독립선언이다. 존재감의 확인이다. 마음이나 정신 속에 나와 너의 영역이 선명하게 구분돼 있어야 가능한 게 거절이다. 자아가 뚜렷하게 서있지 않으면 타인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다. 잘된 거절엔 미학이 있다. 이유가 납득할 만하고 방법이 예의바르고 정중하면 거절도 매력적인 행위가 된다. 그런 거절이라면 상대방은 그리 기분 나빠 하지 않을 것이다. 거절 후엔 서로가 더 존중할 수 있다.

민주당 김효석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의 교육부총리직 제안을 거절한 것은 신선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의 호의적 요청을 거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 대통령을 찾아갔다. 교육이 자기 전문 분야가 아니며 조직인으로서 당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를 솔직하게 얘기했다. 이 모든 판단과 행동과 발언의 원천은 김 의원의 내면이었다. 내면의 순정한 결정이 거절에 가치를 부여했다.

거절에 미학이 있다면 수용엔 미덕이 있다. 공직을 부름 혹은 소명(Calling)으로 인식하는 경우 특히 그러하다. 거절할 수 없는 하느님의 부름, 공동체의 소명과 같은 것이다. 부름은 개인에게 희생을 요구하기도 한다.

당파적 의리를 버리고 대통령의 부름에 응해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는 미국 클린턴 대통령 때의 데이비드 거건이다. 거건은 닉슨.포드.레이건 대통령 시절 백악관에서 근무했다. 워싱턴 정가에서 알아주는 공화당 소속의 중진 언론인이었다. 그는 민주당인 클린턴 대통령이 참모가 돼 줄 것을 요청하자 고민 끝에 수용했다. 당시 클린턴은 자기를 멸시하는 의회와 언론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유능하고 노련한 조력자가 절실했다. 거건은 그 적임자였다.

골수 공화당원들은 거건을 "배신자" "매춘부"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남부 토박이의 공화당 출신으로 모든 국민은 국가의 부름에 응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자랐다. 이번의 부름은 곤란에 빠진 미 합중국 대통령이 직접 요청한 것이어서 특별했다. 애국심은 당파주의에 우선해야 한다."

거절엔 짧고 강렬한 고뇌가, 수용엔 길고 복잡한 고뇌가 뒤따른다. 어떤 선택이든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부름을 거절하면 인생은 강해질 것이다. 부름을 수용하면 인생은 풍부해진다.

전영기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