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호텔과 찜질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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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 후보자와 비교되는 인물이 이광재 강원도지사다. 이 지사는 당선 직후 직무가 정지돼 관사(官舍)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호텔은 물론 여관에도 가지 않았다. 대신 춘천시 칠전동의 한 찜질방을 찾아가 잠을 잤다. 우리 시대에 찜질방이 무얼 상징하는지는 다 안다. 없는 사람들이 하룻밤을 청하는 곳이다. “정치적 쇼가 아니냐”는 물음에 그는 “선거운동 때도 잘 곳이 없으면 자주 찜질방에서 잤다”고 짧게 답했다. ‘낮은 자세’에 관한 한 이 지사는 보통 고(高)단수가 아니다.

정치 세계에선 ‘스케줄도 메시지’라는 말이 있다. 어디서 누구와 만나는지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지난달 6일 이 지사의 행보는 눈여겨볼 만하다. 이날 오전 그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으로 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의 결의대회에 찾아갔다. 헤드 테이블엔 그의 자리가 없었다. 도지사 권한대행이 대신 앉았다. 내빈 소개 때는 맨 마지막에 호명됐다. 공식 사진 촬영 때도 중앙에서 밀려났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도 그는 불편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정작 이날 저녁 가장 중요한 모임이 열렸다. 이건희 삼성회장이 동계올림픽유치위원장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과 이 지사 등을 서울 한남동 승지원에 초청했다. 여기에서 오간 평창올림픽 유치를 위한 내밀한 이야기는 일절 공개되지 않았다. 이 지사는 직무 정지 이후 “공식적인 자리엔 숨어 지내고,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실질적인 노력은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스케줄도 그의 다짐대로였다.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그의 능력은 놀라웠다. 순식간에 “우리 도지사가 온갖 박대를 당하고 찜질방에서 밤을 지새운다”는 입소문이 퍼졌다. 강원도 민심이 사나워졌다. 결국 한나라당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강원도당위원장인 황영철 의원이 직접 “도지사를 선출한 도민들의 심정을 헤아려 그에 합당한 예우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눈치만 살피던 행정자치부와 강원도청은 곧바로 관사와 승용차를 제공했다.

이번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왜 8·8개각(改閣)을 했는지 헷갈릴 정도가 됐다. 민심을 다독이는 김영삼 정부식 국면전환용 개각으로 보기엔 애매하다.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의 정면 돌파형 개각과도 거리가 있다. 대통령 측근들을 전진 배치한 친정(親政)내각이라 하기엔 이미 정치적 흠집이 너무 많이 났다. 국민들 귀에는 야당의 ‘4대 필수과목’이라는 비난부터 쏙쏙 들어온다. “사전에 청와대와 상의했다”는 후보자 증언이 사실이라면 청와대의 도덕적 기준까지 의심스럽다.

물론 각료 임명은 대통령의 고유한 인사권이다. 하지만 이 정부가 애지중지해온 ‘친(親)서민’ 구호는 무색해졌다. 우리 사회가 ‘찜질방 vs. 고급호텔’ 중 누구 손을 들어줄지는 뻔하다. 여전히 국민들 뇌리에는 여러 차례 낙선하면서 운명공동체를 형성했던 노무현 정부의 기억이 남아있다. 이번 청문회를 거치면서 온갖 흠결을 안은 인사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권력 주변에 모여든 게 아니냐는 인식이 굳어질지 모른다. 앞으로 대통령의 고민은 깊어갈 듯싶다. “왜 우리에게 안희정·이광재는 없느냐”는 한탄도 자주 듣게 될 것 같다. 논설위원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