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일용엄니' 김수미 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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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의 마지막 편 촬영이 있던 지난 16일 오후. MBC 방송국 내 C스튜디오는 갑자기 웃음바다가 됐다. 노마가 취직이 됐다며 일용 엄니에게 인사를 하는, 아주 짧은 장면에서였다.

노마가 "저희 아버지한테 너무 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번엔 쌍화탕도 갖다 주시고"라고 말하면 일용 엄니는 "아이구, 별것도 아닌데 뭘"이라고 맞대사를 치면 그만이었다. 큐사인이 들어오자 일용 엄니 입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말. "아이구, 그거뿐이냐. 닭도 삶아주고, 홍시도 갖다주고, 편육도 나눠먹고…."

우리에게 '일용 엄니'라는 호칭이 더 친숙한 탤런트 김수미(51)씨. 언뜻 차갑고 냉정해 보일 것 같은 그녀는 '전원일기'팀의 분위기 메이커다. 코미디언에 버금가는 애드리브 때문에 NG가 나기 일쑤지만 누구 하나 짜증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가 있어 촬영이 즐거워진다.

"주어진 대사만 하려고 작심해도 자꾸 딴 말이 튀어나와요. 이런 상황에선 실제로 이런 말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즉석에서 떠오르죠. 22년간 함께 해온 우리 팀 식구들이 아니라면 맞받아치지도 못할 겁니다."

1980년 10월부터 22년간 농촌 이야기를 다룬 '전원일기'의 29일 마지막 방송을 앞두고 그녀의 가슴 한쪽은 허전해 보였다. 첫회부터 지금까지 악착같이 출연한 드라마가 아니었던가. 갑상선에 문제가 생겨 절대 안정을 취해야 했던 3주간을 빼놓고 그녀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드라마가 시작될 때 그녀는 스물 아홉이었다. 예쁘장한 외모로 잘나가던 그녀가 예순살의 농촌 할머니 역할을 맡는다고 했을 때 주위의 만류도 심했다.

"오히려 색다른 연기 변신의 기회였어요. 나이 마흔에 할머니 역할을 맡으면 '아, 나도 늙었구나'하고 생각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젊었고 그 나이에도 할머니 역을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자신했어요."

어린시절 농촌(전북 군산)에서 자란 경험이 큰 도움이 됐다. 일용 엄니 특유의 목소리가 특히 그랬다. "우리 동네에 딸을 아홉명이나 내리 낳아서 '딸그만'이라 불리는 할머니가 있었어요. 온동네 경조사 다 챙기고 노래·춤도 아주 잘했죠. 그 할머니 목소리가 양철 두드리는 쇳소리가 났는데, 내가 그걸 좀 차용했죠."

장난기 많은 그녀는 실제 촬영에 들어가서야 비밀병기인 이 목소리를 공개해 제작진을 경악케 했다고 한다.

일용 엄니의 환갑잔치를 다룬 2백회 특집이 방송된 후엔 팬들이 스웨터 40여벌과 한복 네 벌을 보내왔다. 너무 고상해서 정작 드라마에서는 입지 못했던 이 옷들은 김씨의 장롱에 고이 모셔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가 고마워하는 것은 마을 사람들의 순박한 정이었다. 겨울날 야외 장면을 찍을 때 추위에 떠는 그녀에게 안방의 아랫목을 내준 것도 그들이요, 툇마루에서 밥 한상을 내놓고 김치를 주욱 찢어주던 것도 그들이다.

그녀는 31일 인도로 떠난다. 바라나시 인근의 한 오지마을에 들어가 글을 쓸 작정이다. 시집·에세이·시나리오·소설 등 그간 틈틈이 내놓은 책이 일곱권이나 된다. 이번에 출간할 에세이집 제목은 '황혼'으로 정했다. 그간의 인생을 정리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다짐, 그리고 '전원일기'에 대한 소회 등이 담길 예정이다.

"이별의 고통이 속앓이를 한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에요. 그냥 빨리 잊는 게 상책이지." 먼 나라 인도까지 갈 결심을 한 걸 보면 그녀에게 '전원일기'와의 이별은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닌 듯했다.

박지영 기자

naz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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