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특별기고] 중국 개방외교 뒷얘기 '스케치하듯' 쓴 첸치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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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당의 공식 입장에 어긋나거나 또는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문제일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공직에서 퇴임한 인사들의 회고록이나 비망록을 구하기 힘들어 특정 사안에 대한 연구가 부진했던 것도 당사자들이 이면사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흐루시초프의 회고록 같은 것이 있지만 이 책은 누가 집필했는지도 확실하지 않고 내용도 의심스러운 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열가지 외교이야기, 첸치천 지음, 유상철 옮김, 랜덤하우스중앙, 435쪽, 1만5000원)은 오랜 관행을 깬 특별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1982년부터 2003년까지 중국 외교의 현장에서 협상을 지휘하고 정책을 수립했다. 이 동안 처음에는 외교부 부부장으로서 소련과의 관계 정상화 협상을 지휘했고, 1988년에 외교부장으로 승진한 후에는 천안문 사태로 최악의 상태에 빠져들었던 미국과의 관계를 다시 복원시켰다. 1992년에는 당 정치국에 진입했고 국무원 부총리가 되어 작년 봄 퇴임할 때까지 만 10년 동안 중국 외교의 최고 책임자로 국제무대에서 중국의 위상을 높였다. 저우언라이가 건국 외교의 주역이었다면 첸치천은 개혁 개방 외교의 대부였다. 개혁의 총설계사가 덩샤오핑이고 개혁의 총공정사가 장쩌민이었다면 개혁 외교를 설계하고 시공한 사람이 바로 첸치천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저자가 털어놓는 개혁 외교의 이면 역사는 무엇보다 서술 양식이 눈길을 끈다. 거대한 이론이나 복잡한 논리로 상대를 압도하고 설득하는 게 아니라 마치 친구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처럼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잔잔하게 전해준다. 그래서 부담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저자는 1940년대 초 10대 시절에 7년 동안 지하활동을 했고 이때부터 모든 일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고 기억에 의존하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이 책도 그의 기억에서 나온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마치 영화 속의 장면들처럼 클로즈업 돼 머리 속을 맴도는 사건들을 꾸밈없이 스케치하듯 썼다." 그래서 역사도 아니고 논문도 아니라는 저자의 겸양에도 불구하고 역사 이상의 훌륭한 가치가 있고, 논문보다 더한 감동과 설득력을 갖는지 모른다. 키신저의 회고록이 머리로 읽는 책이라면 이 책은 가슴으로 읽는 책인 셈이다.

서술 방식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이 책은 한 번쯤 꼭 읽을 가치가 있다. 특히 한.중 수교에 관한 부분이 그러하다. 저자가 김일성에게 한국과의 수교에 관한 장쩌민 총서기의 구두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것은 한.중 수교가 발표되기 한 달쯤 전인 1992년 7월 15일이었다. 아침에 북경을 떠나 다시 북경으로 돌아 온 것이 그 날 오후 5시 쯤이었고 이 날 김일성과의 회견은 "역대 중국대표단의 회견 중 가장 짧은 것"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1980년대부터 21세기 초까지의 20년 동안 험준한 도전에 맞서 쉽지 않은 길을 걸어온 중국 외교"의 모든 일에 참여해온 저자에게는 가장 길고 어려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한.중 수교가 중국에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으며 동시에 중국의 개혁 외교가 얼마나 험난한 길을 걸어왔는지를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정종욱 아주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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