튼튼한 공화주의 뿌리와 국민의 힘이 든든한 버팀목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80호 08면

미국에선 역대 대통령과 군의 갈등이 간간이 있었지만 쿠데타를 비롯한 군사적 정변은 한 번도 없었다. 이유가 무엇일까?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수한 역사적·문화적 전통과 배경 때문이다.가장 먼저 철저한 공화주의적 전통을 들 수 있다. 건국 이전 주류 아메리카인은 대부분 공화제를 최고의 정치체제로 생각했다. 영국의 청교도 혁명기를 전후해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이 아메리카인의 주류였는데, 이들은 영국의 군주제와 호국경이 된 크롬웰의 독재에 염증을 느낀 청교도였다.

미국의 흔들림 없는 ‘문민 지배’

물론 종교의 자유가 이민의 중요한 이유이기는 하지만 이민자들은 새로운 땅에서 공화정의 가능성을 꿈꾸었다. 이들은 로마 공화정을 새로운 나라가 추구해야 할 모범적 전형이라고 생각했다. 로마 공화정은 권력이 어느 개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등 건국의 아버지들은 어떻게 하면 새 나라에서 이를 미연에 막을 것인가에 집중했다. 이들의 생각과 고민은 독립과 함께 미국 헌법으로 구체화됐다.

둘째, 철저한 3권 분립 원칙이다. 미국 헌법은 공화정의 전통을 살려 권력이 어느 개인이나 집단에 집중되는 것을 가장 경계하고 있고, 이를 위한 적절한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 있다. 대통령·의회·사법부는 서로를 견제하는 가운데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내며 그 방향과 목표는 일반 국민에게 맞추어져 있다.

셋째,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위대한 첫 단추를 생각해야 한다. 민간인 출신의 워싱턴은 민병대로 구성된 독립군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독립전쟁 초기의 온갖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고 지상 최고의 군대를 보유한 영국을 상대로 궁극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승전 후 다수의 군인이 정부(대륙회의)의 지지부진한 대우에 불만을 품고 최대 권력을 가진 워싱턴에게 왕이나 군주가 되라는 군사 쿠데타(뉴버거 음모사건)를 주문했다.

하지만 워싱턴은 군부의 이런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자신의 칼을 대륙회의에 반납하고 농부로 돌아갔다. 그 후 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된 워싱턴은 3선 혹은 종신 대통령에 대한 집요한 요구를 미연에 차단하면서 무려 10개월 전에 ‘고별 연설’을 발표해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실현시켰다.

아울러 대부분의 미국 국민이 철저한 개인주의적 민주주의자들이라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개인주의 윤리와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생활해 왔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파괴하는 것이라면 그 무엇도 용납하지 않는 의식과 이 의식의 실천을 지상목표로 삼고 있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총기를 소유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힘을 가진 자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래서 군인 신분으로 권력을 탐하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 곧 최고의 공적(公敵)이 되는 것이다. 어느 개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는 공화정 전통과 그것을 보장하는 제도,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국민들이 오늘날 미국의 문민 우위를 유지하는 핵심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