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초에 한 번꼴 "자유"…부시 취임사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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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일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한 여성이 "어머니들은 (자식을 잃고) 슬퍼하는데 부시는 춤춘다"고 쓴 플래카드 앞에 앉아 있다.[루이빌=AP 연합]

이런 취임사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다. 17분간의 길지 않은 연설에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자유라는 단어를 무려 39회나 사용했다. 형용사로 쓴 "자유로운"이라는 말을 제외하고도 서른아홉번이다. 앞으로 4년 동안 자유를 기본으로 하는 대외정책에 올인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취임사는 구체적인 정책보다 큰 비전과 철학을 선포하는 연설이다. 그래서 부시가 강조한 자유의 세계적인 확산은 그가 지향하는 이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취임사의 기조가 하나에서 열까지 자유라면 부시 2기 정부의 대외정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는 스스로 분명해 진다. 자유에 관한 발언과 자유를 실현하는 전략에 관한 말과 글의 홍수가 예상된다. 부시는 다른 나라들이 자유를 누려야 미국의 자유도 존속할 수 있다는 논리로 자유를 전세계에 확산하는 정책을 정당화한다.

자유의 기준은 무엇인가. 소련 반체제 투사 출신인 이스라엘의 우익 정치인 나탄 샤란스키의 저서 '민주주의론'이 이미 대답을 했다. 샤란스키는 자유를 '도심의 광장에서 자신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밝혀도 처벌이나 보복을 받지 않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부시는 이 책을 탐독하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부시는 미국이 모든 나라, 모든 문화에서 일어나는 민주화 운동을 지원해 궁극적으로 세계의 모든 폭정을 종식하겠다고 선언했다.

어떤 나라가 자유 수출의 대상인가. 미국이 선정한 폭군들의 나라다. 부시의 취임식에 이틀 앞서 국무장관 내정자 콘돌리자 라이스가 상원 외교위원회 청문회에서 북한.이란.미얀마.쿠바.벨로루시.짐바브웨 여섯 나라를 폭정의 전초기지라고 말해두었다. 부시 취임사에는 폭정과 폭군을 제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도 여섯번이나 나온다. 부시와 라이스의 빈틈없는 역할분담이다.

폭정은 어떻게 종식한다는 것인가. 부시의 대답은 부시답게 명쾌하다. "폭정과 절망 속에 사는 모든 사람이여, 미국은 당신들이 받고 있는 억압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며, 당신들을 억압하는 인간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들이 자유를 위해 일어서면 우리도 함께 일어설 것이다." 이 말은 폭군들에게는 소름끼치는 경고일 것이고, 폭정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들고 일어나라는 속삭임으로 들릴 것이다. 부시는 자유의 수호와 확산은 기본적으로 비군사적인 수단으로 하겠지만 필요하면 군사적인 수단을 동원하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정치가들에게 자유는 가장 보편적이고 인기있는 개념이다. 링컨에서 레이건까지 부시의 많은 선배 대통령도 자유의 가치를 자주 강조했다. 폭군과 독재자가 아닌 한 어떤 나라, 어떤 국민도 자유의 신장에 반대할 사람은 없다. 언제나 문제는 방법이다. 부시는 민주주의 운동을 지원해 자유를 억압하는 폭정을 종식하겠다고 말하지만 지금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이라크의 현실은 부시의 그런 전략에 문제가 있음을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폭군 후세인이 물러난 이라크에 남은 것은 피비린내나는 테러와 혼란뿐이다.

콘돌리자 라이스가 폭정의 전초기지로 꼽은 북한 인민들에게 어떻게 자유를 가져다 줄 것인가는 우리의 이해와 직결된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샤란스키는 도심 광장에서의 언론 자유를 말했지만 북한의 많은 주민은 자기 집안에서도 마음놓고 말할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미국은 이미 북한 인민들의 반체제 감정을 자극할 만한 북한 인권법을 시행하고 있다. 취임사에 나타난 부시의 자유에 대한 강력한 집념만 가지고 보면 북한이야말로 자유 수출 대상국으로는 영순위에 드는 나라일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미얀마나 짐바브웨.벨로루시와는 달리 핵무기 개발 계획과, 어쩌면 핵무기 자체와 미사일이라는 강력한 대항수단을 갖고 있다. 여기서 자유를 축으로 하는 부시 정부의 정책은 한계를 맞는다. 그래서 부시 정부의 자유 확산 정책에 일방주의를 경계한다. 우리는 당연히 자유를 지키고 세계에 널리 확산하자는 부시의 비전을 원론적으로 환영하면서도 현실정책으로 북한에 적용될 방법에 대해서는 충분한 협의를 받아야 한다.

북한은, 민주주의 확산으로 폭정의 전초기지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라이스의 선언에 이어 세계를 폭정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의지를 저렇게 강력한 어조로 밝힌 부시 취임사가 미국의 대북정책에 어떻게 반영될 것인가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그 진의를 이해하는 데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오늘의 부시는 지난 4년의 부시보다 정치적으로 세련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노회하기도 하다는 것을 잊으면 그만한 대가를 치를 것이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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